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미국에 망명한 시절이었다. 1983년 시카고에서 김대중 강연을 준비하는 일로 첫 대면을 하게 된 인연은 1985년 그가 망명을 끝내고 한국으로 귀국할 때 같이 비행기를 타고 수행하는 인연으로 깊어졌다.
이러한 인연은 1987년 가을 그가 복권을 앞두고 정치적 중심에 섰을 때 그를 만나기 위해 잠시 귀국을 하게 했다. 동교동 자택에서 마주 앉은 나는 “선생님, 김영삼 선생님과 야당 단일화 후보를 성사시키지 못할 경우 선생님이 양보하십시오” 하는 말을 했다.
이때 그는 “조 동지는 동전에 양면이 있는 것을 몰라”라고 했다. 현실 감각이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미국으로 돌아와 장문의 편지를 썼고 이것이 그와의 인연의 끝이었다.
김대중 씨의 별세 소식을 들은 뒤 22년 전에 썼던 30여장의 편지를 읽으면서 인간의 판단, 특히 지도자의 판단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시대와 역사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거듭 되묻고 있다.
나는 김대중을 민주운동 지도자로 만났다. 양심이 마비되고, 자유가 질식되고, 민주주의가 신음했던 어둡고 억눌린 시대에 김대중은 불사조처럼 일어서서 독재와 맞섰다. 김대중의 용기와 투쟁은 내 가슴을 뛰게 했고, 현해탄에서 살아남고 사형대에서 목숨을 건진 김대중을 미국에서 만난 것은 내게 감격이었다.
그러나 이 감동과 감격은 김대중을 정치인으로 다시 만나면서 안개처럼 걷히기 시작했다. 민주운동 지도자 김대중이 정치인 김대중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그동안 쏟아 놓은 빛나는 언어와 화려한 웅변을 감당할 수 없었다.
김대중의 가장 큰 업적은 민주화 운동이었다. 박해와 고난을 이기고 한국 민주화를 성취시키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민주주의적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독재와 항거하면서 민주주의 깃발을 들었지만, 그의 의식과 행동은 비민주적 요소가 많았고, 구시대의 제왕적 체취가 흘렀다. 김대중은 한국을 민주화로 가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한국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역설이 되었다.
김대중은 인권과 양심을 부르짖었고, 독재 정권에 굴종하던 양심에 채찍질하고, 짓밟히는 인간의 존엄성을 역설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떠올랐고, 박해받는 사람들의 희망이 됐다. 그러나 정치인 김대중에게 양심은 권력보다 뒤에 섰고, 인권은 정치적 야망의 그늘에 가려졌다.
김대중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진실을 외치면서 독재 정치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질타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돈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자유스럽지 못한 정치인이었다. 수십 년간 박해받는 정치인이 되면서 김대중의 부패는 그늘에 가려졌다. 김대중에게 전해진 수많은 후원금과 정치자금이 얼마였고, 어떻게 쓰였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김대중의 대표적 업적 가운데 하나가 남북정상회담이다. 민족의 가슴을 뛰게 했던 6.15 정상회담이 진정으로 통일을 위한 순수의 열망이었느냐 하는 의문이 따르는 것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기도 하다. 대통령과 노벨상은 김대중이 꿈꾸었던 최대의 목표였을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민주주의를 부패시키고 파괴시킨 김종필과 동지가 되는 것을 서슴지 않았던 김대중은 노벨상과 직결된 남북정상회담을 이루기 위해 막대한 국민의 세금을 비밀리에 북한에게 주었다.
김대중이 심혈을 쏟았던 햇볕 정책은 북한에 햇볕을 보내면 북한이 체제의 외투를 벗는다는 철학적 전제가 있다. 이 출발은 잘못된 것이었다. 북한은 남한에서 아무리 햇볕을 보내도 외투를 벗지 않을 것이다.
김대중은 통찰력과 정치 감각을 가진 뛰어난 정치인이었지만, 스스로에 대한 과신과 자만심으로 팀워크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모질고 혹독한 겨울을 이긴 인동초에서 인간의 가슴을 훈훈케 하는 가을 국화의 향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 내 가슴에 김대중은 인동초의 치열성은 넘치지만 국화의 향기가 없다.
조광동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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