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대학을 나오자 여고 미술교사로 들어갔다. 당시 학제가 1학년부터 6학년까지였는데 나는 1, 2, 4학년을 맡았기에 직접 가르친 일은 없었으나 6학년에는 나와 동갑내기도 두어 명 있다고 들었던 터라 이 새내기 선생은 바짝 긴장을 하고 일에 매달렸다. 자칫 공정치 못한 점수라도 매길세라 그 숱한 도화지를 한 장 한 장 면밀히 비교해 가며 채점을 하다 보면 어둑어둑할 때까지 교무실을 뜨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정신없이 몇 달이 흘렀을 때 이대 김활란 총장 비서실에서 “중요한 모임이 있으니 경기고녀 강당으로 꼭 나오라”는 명령조의 전갈이 왔다. 그 날도 몹시 바빴으나 대강 마무리하고 시간에 늦을세라 서둘러 그 곳에 도착해 보니 벌써 꽤 여러 명의 여류 인사들이 모여 서로 담소하고 있었다. 얼른 보기에 이대 교수 몇 명에다 서울 사대의 손정규 학장(6.25때 납북) 그리고 내가 나가는 창덕의 박승호 교장(6.25때 납북) 등 앉아 계시기에 인사 드리고 머리를 드니 김활란 박사님이 이쪽으로 걸어오셨다.
“금년도 이대 미술과 졸업생입니다. 장차 좋은 일꾼이 될 겁니다. 미술가 대표로 불렀습니다” 다들 박수를 치고 나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숙였다. 저쪽에 앉은 젊은 분이 달려와서 자기 옆에 앉으라고 끌고간다. “나는 정훈모라고 해요” “아, 소프라노의?”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나오라고 했는데 와보니 맨 어른들 뿐이고 저는 겨우 27세밖에 안 됐으니 김 선생이 금년 졸업생이라 저보다 젊으실 테니 좀 안심이 되네요”하지 않는가. 대한민국 여성계의 최고 지성들이 모인 그 자리에 20대인 우리는 꼭 붙어 앉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인사소개가 시작되었다. 경기고녀의 박은혜 교장, 서울여대의 고황경 학장, 언니 되시는 고봉경 선생(경찰 간부, 6.25때 납북), 임영신 상공장관(중앙대 학장), 상명고녀 배상명 교장(후에 학장), 시인 모윤숙·노천명, 소설가 최정희·김말봉 선생, 이대의 최이순 교수(후의 연대 가정대학장), 최이권 선생(백낙중 박사 부인), 이대의 김영의 교수(음대학장), 김애마 교수(교육대 학장), 성악가 김자경 교수, 영문학자 박마리아 교수(후에 이대 부총장), 성신의 이숙종 교장(후에 성신여사대 학장), 부교장 조기홍 선생(후에 창덕·경기여고 교장), 중앙여고 황신덕 교장, 언니 되시는 황애덕 선생, 숙명의 송금선 교장, 교육자 박인덕 선생, 그리고… 기억나는 대로 적고 있는데 아물아물하니 이제 그만 하자.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에 ‘여학사협회’가 탄생하게 되고 초대회장으로는 김활란 박사를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다음은 세 분의 분과위원장을 뽑게 되어 영문학자 김아무개 교수(6.25때 납북), 모윤숙 선생, 박마리아 선생이 당선되었는데 세 분은 자기 위원회를 움직일 위원 5명씩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마리아 선생이 다섯 번째로 내 이름을 부르시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기가 막혀 일어서지도 못했었다. 그렇게 되어 여학사협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으나 쟁쟁한 여류 인사들 틈에 끼어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몇 달 후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교장실에서 부른다 하여 가보았더니 박마리아 선생이 와 계셨는데 두 분은 깔깔대며 “생전 결혼을 안 할 것같이 보이던 사람이 벌써 결혼을 한다”면서 재밌어 하셨다. “결혼 축하해요. 내가 들고 왔어”하시며 곁에 놓인 둥그런 양은 밥통을 가리키신다. 참으로 소박한 시대의 얘기가 아닌가? 천하의 이기붕 선생의 부인이 손수 그 묵직한 것을 들고 오셨단다. 밥통 옆쪽에 ‘축 화혼 여학사협회 증’이라고 파여져 있었다. 그 얼마 후 6.25가 터졌고 그 밥통은 써보지도 못하고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야 했다.
김순련 <화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