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김에 땀이나 좀 빼고 가요?”
2006년 3월, 샌프란시스코 어느 공원 축구장. SF한인축구클럽 상록수의 40팀이 4월 시작되는 마린리그에 출전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취재차 찾아간 기자에게 출전경위 등 이모저모 대답해준 조행훈 당시 SF한인축구협회장은 여벌 유니폼을 툭 던져주며 축구를 권했다.
축구? 어렸을 땐 했던 축구랄 수도 없는 공터축구, 서울에서 초년병 기자시절에 했던 비실축구(이 역시 축구랄 수 없는 축구다), 그리고는 미국에 온 이후 LA에서 야유회 때 잠깐 해본 깔짝축구 이외에는 해본 적도 없지만, ‘보는 축구’만은 누구 못지 않게 좋아하는 종목 아니던가? 월드컵이다 유럽선수권이다 챔피언스리그다 하면 마치 세상에 둘도 없는 전문가처럼 족히 책 몇권쯤은 될 분량을 축구스토리로 장식했던 내가 아니던가?
해보지 않으면 모르고, 모르면 겁이 없다던가? 나는 별로 빼지도 않고 그가 던져준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약식인터뷰를 하는 동안에 연습경기는 이미 시작됐다. 몸을 푸는둥 마는둥 실전 축구판에 곧장 뛰어들었다. 내가 겁 없는 천둥벌거숭이임을 깨닫는 데는 그저 삼사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리 엄벙 저리 덤벙 몇번 쫓아다닌 것뿐인데도 코르크마개를 찔러넣은 듯 목은 콱 막히고 공기 대신 겨 따위를 우겨넣었는지 가슴은 미어지고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하늘은 놀놀하고,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다. 와중에도 “아니 공은 못차도 뛰는 건 웬만큼 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알량한 그 생각에 이삼분정도 더 버텼다. 하지만 몸이 무너지는데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건강한 땀은 고사하고 부실한 한숨만 실컷 내뿜으며 필드를 벗어나야 했다.
천만다행, 그날의 호된 신고식을 겪고서 나는 축구생각을 고쳐먹었다. 기사를 위한 ‘쓰는 축구’나 재미를 위한 ‘보는 축구’ 말고도, 건강을 위한 ‘하는 축구’도 좀 해보자고 결심했다. 그 뒤로 나는 매주연습은 어려워도 한달에 한번정도 축구땀 현장에 참가하는 걸 원칙으로 했다, 그나마 몇달씩 거른 적이 많지만. 북가주 축구인들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3년 반이 흘렀다. 공놀이 실력은 여전히 꽝이다. 그러나 그날 이후 몸 가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은 얼추 틀이 잡혔다. 비단 축구가 아니라도 간간이 시간주(시간 정해놓고 뛰기)와 거리주(거리 정해놓고 뛰기)를 병행하는 한편으로 태권도 기공 태극권 등으로 ‘구겨진 몸 되펴기’를 나름 열심히 하게 됐다. 덕분에, 뛰는 양은 3년 반 전 신고식 때에 비해 족히 10배는 늘었다. 이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축구가 안겨준 보너스는 더 푸짐하다. 축구인들과의 만남이다. 한마디로 사나이들이다. 겉보기엔 얼핏 거칠지만 선후배 사랑과 우정이 여간 아니다. 상록대회 일맥대회 한얼대회 등 축구잔치 때는 물론이고 평소 연습 때도 그렇다. 뙤약볕을 마다않고 온종일 운동장에 나와 아들뻘 손자뻘 선수들을 격려하거나 몸소 심판으로 나서곤 하는 72세 유기형 고문, 일맥 경기가 있으면 터치라인 바로 옆에 앉아서 고래고래 애정어린 악살을 먹이며 웃음꽃 속에 사기를 돋우는 박기철 전 SF축구협회장,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팔팔하게 필드를 누비며 해송팀을 이끌고 있는 서양수 전 SV축구협회장, 해체위기에 놓인 아가페팀을 고정 참가인원 50명이 넘는 탄탄클럽으로 부활시킨 임병동 전 회장과 김규영 현 회장, 축구가 열리는 날이면 만사 제쳐놓고 새크라멘토에서 달려오는 조병로 선수 등 축구4총사….
최근 SF축구협회(회장 이상호) OB축구단(단장 김수창)과 함께 제주도 원정을 다녀왔다. 풀타임 취재 겸 파트타임 선수 노릇을 하면서, 그 사나이들의 ‘축구와 우정’을 새삼 확인한 기회였다. 승부근성도 대단했다. 나는 밖에서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필드에만 들어서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겁이 났지만 ‘그들’은 밖에서는 허리 아프다 무릎 까졌다 아우성을 치면서도 막상 필드에 들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죽자사자 뛰었다. 간혹 경기도중 험한 소리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뿐, 그 순간만 지나면 다시 밀어주고 끌어주고 주거니 받거니 동료애를 발휘하는 장면도 멋지게 다가왔다.
축구에는 확실히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몸소 뛰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살냄새 땀냄새 맡아가며 직접 부대껴보지 않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엇이다. 더욱 중요한 건 축구실력이야 고만고만 제자리걸음을 치더라도 뭉툭하게 남는 또다른 무엇이 있다는 점이다. 건강한 우정, 건강한 활력이다. 축구, 그것은 아무리 못해도 해볼 만한 운동이다.
<정태수 기자>
◇제주도 원정 샌프란시스코 OB선수단 ▷고문: 옥태언 ▷단장: 김수창 ▷부단장: 강승혁 ▷감독: 문동일 ▷선수: 이상호(축구협회장), 조행훈, 최원, 백종만, 정문영, 한영석, 최병균, 조병로, 김승휘, 김창래, 신성재, 이득민, 장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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