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횡단철도 개통으로 몰려든 동부실업자들과
염가 생필품 범람으로 생긴 서부 경제공황 원인 중국인들에게 돌려
중국인들이 미국을 찾은 것은 캘리포니아의 금이 탐 낫기 때문이었는데, 그 노다지 판에서도 초장부터 차디찬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다. “금광 붐”의 시작연도인 1948년부터 2년째 되던 해인 1850년에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금광에 종사하는 모든 외국인에게 매달 두당 $20(당시 화폐가치로는 큰 부담)의 세금을 납부할 의무를 부과하였다. 표면상으로는 모든 외국인이라고 하였지만 실재적으로는 중국인과 멕시코인 들을 겨냥한 법이라는 것이다. 1852년 5월에는 Yuba County당국에서 중국인의 금광 채굴권(採掘權=claim)을 인정치 않는다는 고시를 하고 모든 중국인에게 County에서 떠나라는 추방령을 내렸다. 이어 Columbia 광구(鑛區)에서는 아시아인과 남해 도서인(South Sea Islanders)은 채광 활동을 금지한다는 포고령을 내렸고 Shasta County에서는 기존의 중국인들의 채광권을 전부 취소하였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 의회에서는 법적으로 시민권을 받을 수 없게 되어 있는 자는 캘리포니아에 이주 해 오는 것을 삼가 하여야 한다는 법령을 제정하였다. 중국인을 겨냥한 것이었다.
1856년에는 Siskiyou County의 Yreka 중국인 동네 인근의 백인들이 모여서 아무 이유 없이 중국인들에게 집단 폭행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상과 같은 학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광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채광이 아닌 상업활동이라던가, 세탁소, 잡부와 같은 일을 하게 될망정 일단 일터를 찾아서 들어갔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Sonoma County라던가 Contra Costa County같은 데서 포도재배와 포도주 양조장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또한 습지를 개간한다던가 도로 건설을 한다던가, 돌담을 쌋는 일에 종사하였다. 중국인들은 농사일에 재능을 갖고 있었으나 토지소유권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작농을 영위하지는 못하였고 야채류를 집집마다 갖고 다니며 파는 행상을 하면서 가계를 유지하였다. 남가주의 Orange County나 Riverside County같은 데에서는 밀감류를 비롯 여러 가지 과일을 재배하는데 불가결의 인력이었다는 것이다.
미역이라던가, 김, 다시마 등 해초 류는 기르기가 어렵고 손이 많이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백인들이 별로 손을 못 대는 업종이었으므로 거이 독점을 하다시피 하였고, 건조해서 중국으로 수출을 많이 하였다는 것이다. 1860년 중엽부터 중국인들은 새우 잡이를 해서 큰돈을 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백인들은 새우의 맛을 모를 때라 잡은 새우는 대부분 건조를 해서 중국으로 보내서 큰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차차로 백인사회에서 새우의 수요가 생기면서 백인 경쟁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새우잡이를 면허제로하고 중국사람들이 쓰던 그물과 방법은 금지 하였고, 새우잡이 기간을 설정한다던가 크기에 제한을 둔다던가 해서 새우잡이에 압력을 가하면서 한편으로는 말린 새우의 수출을 전면 금지하여 결국은 중국인들을 그 분야에서 몰아냈다는 것이다. 시가(cigar) 제조업계에서도 1859년에 중국인을 고용하기 시작을 하였는데, 1870년까지의 사이에 시가업계의 종업원 90%정도가 중국인이었으며, 수많은 공장이 중국인 소유였는데 중국인 배척풍조의 탓으로 1880년대에 대부분의 중국인이 “시가”업계에서 떠나게 되어 “시가업계”가 몰락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외에도 중국인들은 각종업계에 진출을 하여 기반조성을 꾀하였으나 백인 노동조합의 반 중국인 활동으로 인하여 뜻을 못 이루고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졸지에 일자리를 놓지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일확천금의 꿈에 부풀어 캘리포니아 금광붐(1848~1855)을 따라와서 뜻밖인 멸시와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견디어냈고, 대륙횡단 철도 부설공사(1863. 1.~1869. 5.)의 서부구간 책임회사인 센트랄패시픽 철도회사 (Central Pacific Railroad)의 주력공부(主力工夫)로써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공헌을 한 중국인 들은 이 두 가지 대사(大事)가 끝장 나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부분이 뿌리 뿌리 헤어져 캘리포니아 각지에서 자리를 잡고 농업, 생산업, 잡부 등으로 귀중한 기술과 일력을 제공하면서 공헌을 하였지만 백인사회의 빈축은 여전 하였는데, 설상가상으로 대륙횡단철도의 개통으로 전혀 예상치 않았던 경제 공황이 몰려들어 어처구니 없는 희생양(scapegoat)으로 몰리게 되었다. 대륙횡단철도를 계획하고 막대한 비용을 드려서 시공한 것은 지리적으로 광범한 국토를 하나로 묶는데 도움을 주며 인구를 널리 분산하고 정치, 견제, 사회, 문화의 균질성(均質性)을 도모함은 물론이고 국민의 결집력과 단합력을 드높이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으로 캘리포니아에 동부의 실업자가 줄지어 들어오게 되었고, 동부에서 염가로 생산된 여러 가지 생활용품이라던가 생산기기 등이 들어와 범람하여 캘리포니아 경제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악화된 경제현상을 중국인들의 저임금의 탓으로 몰았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을 사회적으로 멸시 당하게 한 요인은 여러 가지 있지만 특히 쿠울리(coolie)라는 용어의 탓을 무시할 수는 없다. 쿠울리를 한문으로는 苦力이라고 쓰는데 그 원 뜻은 심한 일을 하는 잡부(雜夫)이다. 노예에 가까운 처우의 노무자지만 결코 노예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 이민초기에 미국사회에서는 미국에 온 중국사람들은 모두가 쿠울리라는 이름의 노예라고 인식을 잘못하였고, 노예이기 때문에 이민으로 받아드리면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 미국서 노예제도가 완전 폐지된 해는 18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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