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던가? 승승장구 치솟던 부동산 가격이 서민들의 “자기집 마련하기” 꿈을 깨어버렸던 것이. 또 탄탄대로로 올라가던 증권시장으로 넉넉한 노후대책을 상상했을 때가. 지난 2-3년간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우리를 움츠리게 하는 단어들이 신문, 라디오, TV, 인터넷, 동료, 친구 그리고 가족들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글로벌 금융위기, 경제 불황, 찬 바람 맞는 부동산 시장, 기름값 상승, 증권 하락, 기업축소화, 강제 휴업, 직원 감소, 소기업 파산신고, 직장해고, 그리고 경제 파동에 덩달아 일어나는 가정파탄 등이다.
살림이 쪼들리니 마음까지 쪼들린다는 어느 부인의 투정, 한산한 가게에 하루 종일 손님오기를 기다리니 마음까지 처량해진다는 가게주인의 한숨, 직장에서 감원한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 자신감이 흔들리면서 행여나 하는 조바심에 상사의 눈치 보는 습관이 생겼다는 노련한 콤푸터 프로그래머, 이렇게 추운 겨울날씨보다 더 냉랭한 추위에 떨게 하는 경제위기와 심리적 위축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경제적 위기와 회복은 심리학자가 아니라 차라리 경제학자가 써야 할 글 제목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심리적 상태는 주위 환경과 직결되어있다. 물론 도를 통한 사람들이야 마음의 동요가 적겠지만 그들 또한 폭풍이 오면 우선 그 자리를 피해야 할 것이다. 또 옛말에 사흘만 굶으면 시상詩想이 사라진다 했듯이 마음은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지만 단지 개인의 성숙도에 따라 그 심리적 표출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오늘 이런 세계적 경제론의 언급이 아니다. 줄어드는 수입으로 집 페이먼트 payment조차 부담이 되고, 구조조정으로 하루가 더 길어진 듯 일감이 불어나 눈덩이처럼 쌓이는 스트레스가 직접 우리 피부로 와 닿는 일상의 경제적 타격을 어떻게 극복하고 대응해야 할까, 그리고 약간 가볍고 새로워진 마음으로 어떻게 새해를 희망으로 차게 맞이할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필자의 생각을 나누려 한다.
상대적 빈곤이란 우리가 이미 어느 정도 잘살고 있어도 더 잘사는 이웃과 비교할 때 느끼는 가난함이라 하겠다. 얼마 전에 만난 서씨는 한국에서 자랄 때 한번도 특별히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다. “물론 잘사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체로 비슷하게 가난했어요. 지금 되돌아 보니 얼마나 가난했는지. 쌀밥 먹는 날이 일년에 몇 번 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특히 더 못산다고 느끼지는 않고 자랐지요.” 거의 일률적으로 못살고 이웃과 물질적 기준이 비슷하다고 생각 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비교를 않는다. 그러나 이 경기불황에도 사업 잘되는 이웃들을 보면서 우리 집은, 나의 비즈니스는 유난히 큰 타격을 받는다고 믿고 있을 때 우리는 더 심각하게 빈곤을 절감하고 불만이 가득 찬다.
경제적 빈곤뿐이랴. 정신적 빈곤으로도 쉽게 위축되는 우리는 대체로 가지고 있는 것 보다 없는 것에, 또 장점보다는 부족한 것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항상 덜 가진 것과 부족한 것을 불평한다. “심리적 끌어당김”의 법칙에 의하면 서로 비슷한 것들을 끌어 당기고, 우리가 집중하고 있는 것을 끌어당긴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의식 중에 부족, 결핍을 우리 삶에 초대하지는 않았는가? 아인슈타인은 “상상은 삶의 핵심”이라 했다. 지금도 늦지 않다. 나는 오늘 현재 나의 삶에 무엇을 보태고자 상상하는가. 이제 번영과 삶의 풍요로움에 눈을 돌리고 “눈에 보이는 부富의 원천인 영적 원동력이 고갈”되지 않게 새해에는 희망으로 꿈꾸고 계획하고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1970년 중반에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가방 두 개에 내가 입을 옷가지들, 오징어 한 축,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성공을 하겠다는 희망”을 잔뜩 넣어왔다는 서씨는 눈물 나게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이민초기의 역경을 잘 참을 수 있었던 것이 잘 살겠다는 의욕과 잘 되리라는 희망이었다 한다. “그때 무엇이던지 하고 싶었던 의욕, 어떤 일도 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 그리고 어떤 난관도 이기며 부딪칠 각오”를 가지고 미국에 왔다는 서씨의 결심은 바로 미국인들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그 이민정신이었다. 우리 모두도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런 정신으로 불타 오른 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 커다란 대륙에 친척 한 사람도 없고, 낯 설은 언어와 환경에 부딪치는 것이 외롭고, 무섭고, 두렵기 보다 오히려 도전해서 잘 살아 보겠다는 그 강한 의지는 엄청난 저력으로 우리를 이 땅에 발 붙이게 하였다. 서씨의 이민 가방 속에 함께 묻어온 그 한 가닥의 희망이 얼마나 거대한 힘이 되어 주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희망은 이 낯선 지구촌에서 떳떳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뿌리내리게 한 엄청난 적응력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었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력을 가진 이민자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기 때문에 미국이 잘 사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Koreans are coming up, huh.” 즉 한국사람들이 각계 각층에서 떠오른다며 대단한 민족이라 칭찬을 했다. 정말이지 우리는 대단한 민족의 후예들이다. 침범을 많이 당한 탓인지 무서운 것 없이 다시 머리 들고 일어서는 오뚜기 같은 민족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저절로 힘이 생긴다. “그래, 우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아.”
삶의 풍요로움이 무엇이며 어떻게 경제 회복을 하는 걸까?
세상사에는 영원한 행복도 없고 또 영원한 불행도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어둔 밤을 밝혀주는 별빛 같은 희망이 있다. 영원한 불행이 없다 함은 “이것 또한 지나갈 것이다”라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사형통, 좋은 일들이 계속될 때에는 영원히 행복할 것처럼 착각하고, 고통의 폭풍 속에서는 비바람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끝없이 묶여 있는 듯 안절부절 발을 동동거린다.
삶의 풍요로움이 성공이라면 성공은 숨차게 달려가 골인하는 것만이 아니다. 성공의 복합성은 일의 성취와 목적 달성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만의 순간들을 모두 포함한다. 삶의 구비구비 비탈진 구석에 숨겨진 기적들은 우리가 넘어져서 잠시 고통의 늪에 주저 않았을 때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꼭 받아야 할 인생수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듯이. 서씨는 성공해야겠다는 강한 의지 덕분으로 물불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로 집값 비싸다는 동네에 큰집도 마련하고 비즈니스도 잘 운영해 나갔다. 그러다 어느 날 그의 삶에도 커브 볼이 던져졌다. 가족관리, 사업관리는 철저했지만 자신의 건강관리에는 문외한이었던 서씨는 대수술을 받게 되면서 몇 달을 병상에 누워있게 되었다. “그 젊은 나이에 큰 일을 치른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지요. 그 결과로 오늘의 건강을 유지”하게 되었다며 일주일에 4일씩 운동하는 것을 소홀하지 않는다며 미소 짓는다.
경제 회복만이 오늘 우리 삶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삶의 무한한 가능성을 무시하고 “한계”라는 무덤 속에 우리를 가두게 될 것이다. 삶의 목적은 상대적이다. 가난할 때는 돈 버는 것에,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투병으로 그 목적에 따라 의미를 둔다. 또 삶의 목적을 향해 박차를 가한다 해도 우리의 주관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목적 달성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 의미를 두고 매일 주어진 몫을 충실히 해나갈 때 우리는 주위의 일들을 정확히 직시하게 되고 우리 내면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과 통찰력을 얻게 된다. 우리가 가는 길이 단지 경제 회복만이 아님을 깨달을 때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모든 위기危機는 기회이다. 위험 속에 기회가 함께 있다는 뜻이다. 경제 위기 또한 잊어버린 인간성 회복을 되찾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것뿐인가요.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지요,” 이제 60을 바라보는 서씨는 몇 년 전 사업이 파산일보직전까지 갔을 때를 얘기한다. “감당 할 수 없이 기가 막혔죠. 그 사이 이루어 논 꿈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그리고 가슴에는 “Why do you treat me like this”라는 원망만 가득 찼었다고 말하는 그의 눈가에는 아직도 그때의 생생한 느낌으로 눈물이 살짝 고인다. 그 사업 실패 이후로 새롭게 변모되어 이제는 작은 것에도 크게 감사하며 살고 있다.
니체의 금언 중에 “우리를 죽이지 않는 일은 우리를 강하게 한다 What doesn’t kill us makes us stronger,”는 말이 있다. 사업실패나 실직이 우리의 의지와 희망까지 쓰러뜨리지는 못한다. 어려운 일들이 우리를 궁지로 몰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을 직면하지 않고 거짓으로 순간순간 피해버리는 그 자세가 결국 우리를 궁지로 몰고 간다. 받아들이기 힘들고 괴로운 현실은 매일 우리를 찾아오고 그것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진실은 시간만이 알고 있다. 우리가 허용하지 않는 한 결코 우리를 파괴하는 것은 죽음 외에는 없다. 왜냐하면 삶은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하느냐에 따라 불행도 교훈이 될 수 있고 고통도 우리를 축복으로 거듭나게 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씨는 자신의 갑작스러운 병치레와 사업실패의 시행착오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또 모든 일은 주관적인 생각과 인식여하에 따라 그 상황이 달라진다. 성장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신체적 정신적 성장통을 잘 겪었기 때문에 끈임 없는 변화에 적응하는 강인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은 투쟁이다. 투쟁에서는 승리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지독한 애착을 갖고 세상 어떤 것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어도 우리는 도전하고 투쟁에 나선다. 그러나 억만 금이 있다 한들 우리는 하루도, 한 시간도 일초의 시간을 돈으로 살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다. 모두 강물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지나간다. 경제적 부유는 더 큰 부유만을 추구하게 만들고 그 욕망 또한 언젠가는 공허로 가득 찰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목적이 영원성을 추구하는 가치관을 세우는 것으로 포커스를 맞추어야 되지 않을까.
3-4년 전 버클리에서 발표한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 한인실태결과의 의하면89%가 종교인이라 보고되었다. 10중에 9명이 적어도 경제적 성공만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 아닌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는 뜻으로 보였다. 이렇듯 우리는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높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 잠시 일어나는 불황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와 정면대응해서 문제 해결하겠다는 긍정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만 상기해야 할 것 같다.
그사이 경기파동으로 물질적 손실을 본 교민들이 많을 것이다. 그 손실로 자신감을 잃게 되었다면, 또 “내가 부족해서”라는 부정적인 자기비판으로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심리적 부담을 주었다면 우리는 정신적 손실로 더 큰 손해를 본 것이다. “일이 어긋날 때마다 남편의 짜증이 더 심해지고 아이들에게 화내는 일로 매일 싸운다”는 Mrs. 조의 마음은 우울하기 짝이 없다. 부정적인 생각이 지배함으로 생기는 연약한 느낌과 다시 설수 없는 것 같은 위축감은 우리의 존재자체까지도 불신하게 한다. 또 이런 불신은 뼈 속까지 침투해가고 “사업이 안되니 죽고 싶다”는 생각과 겹쳐서 가정을 파탄으로 끌고 갈 수도 있다.
이렇듯 경제적 타격을 받을 때는 물심양면으로 고달프다. 그러나 삶의 무게에 짓눌려 피해의식으로 뒤로 물러서는 것은 의지 강한 우리의 참 모습은 아니다. 겨우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움직여야 하고 하나를 크게 잃고 재대로 회복할 겨를도 없이 새롭게 밀려오는 삶의 파도에 당면해야 할 두려움이 우리를 움츠리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새 도전에 맞서고, 받아들이고 부서지고 무너지고 그리고 또다시 일어남이 가장 바람직한 우리모습 아닐까? 참된 모습은 자신에게 너그럽고 용기 주고 다시 일어서라고 격려하는 지혜를 갖고 고통이 결코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새 삶에 디딤돌이 되도록 깨어있는 모습이 아닐까.
그 깨어있는 모습으로 새해를 맞이하자. 마음 구석구석에 스며든 경제타격이라는 악 기운을 밀어내고 이민 초기, 희망에 부풀었던 그 초심으로 돌아가자. 아무 가진 것 없이도 이 땅에 우뚝 서게 한 그 뚝심을 자아냈던 희망. 이민 보따리 속에 묻혀와서 끝없이 우리에게 원동력을 주었던 그 희망은 앞으로의 어려움도 물리치게 할 힘을 줄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의 싯귀처럼 깃털과 같이 가볍게 소리 없이 우리에게 닦아오는 희망, 그것이 기적의 한 조각이다. 희망은 작은 친절을 베푸는 마음의 풍요로움이고, 격려하고 동감해주는 너그러움이며, 힘든 이웃의 아픈 상처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따뜻한 마음이다. 기적은 멀리 있지 않다. 새로운 이해의 눈을 가질 때, 잠시 잊었던 것을 깨달을 때 바로 우리 손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안네 프랑크는 “티끌만큼도 이루어질 리 없는 그 많은 희망들을 저버리지 못해 자신이 바보스럽기만 하다”고 고백하면서 좁은 다락방에서도 끝내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세상을 이기는 그 희망의 힘은 안네의 모든 고통을 승화 시켰고 오늘 우리에게까지도 계속 희망을 저버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희망은 믿음이고, 그 자체가 행복이다.
희망은 혼동을 견뎌내고 새 도전을 허용한다.
희망은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찾아내고 진실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어 준다.
최현술 박사 약력
- 현재 VA 병원에서 근무
- 행복원, 법정, 비즈니스 컨설턴트
- UCSF 청소년 분과에서 코디네이터 경력
- RAMS, USF에서 수퍼바이저 경력
<사진설명>
파키스탄으로 피난 온 아프가니스탄 난민 아이들. 상대적 빈곤감이 적은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정신적 빈곤감이 더욱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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