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참전 하와이 재향군인들의 상처는
60년의 세월로도 치유 못하고 여전히 아파...
하와이 한국전참전 노병들의 아픈 이야기
한국전 발발 60주년을 맞아 오는 9일 펀치볼 국립묘지에서는 군포로 실종자들을 기리는 특별행사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4월9일은 2차대전 당시 미군 포로가 가장 많이 발생한 날로 하와이 재향군인회는 이날을 기리며 한국전 당시 참전했다 포로가 되었던 노병들의 경험담을 듣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날 행사를 적극 주관하며 기조연설을 맡을 예정이었던 한국전 생환포로 닉 니시모토씨의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행사가 중단 되었다.(하와이에 생환된 한국전참전 포로는 40여명이었지만 현재 생존하고 있는 재향군인들은 2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본보는 니시모토씨를 포함, 9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한국전 참전 생존 포로들이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가슴에 품고 있는 아픈 상처를 지면을 통해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져본다.
<편집자주>
닉 니시모토
(Nick Nishimoto)
니시모토(사진)씨는 1929년 생으로 힐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육군에 입대했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에 주둔 중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국전이 발생한지 3주만인 1950년 7월13일 제25사단 소속으로 포항만에 상륙해 낙동강 전선에서 처음 북한군과 맞닥뜨렸다.
상등병인 니시모토씨는 기관총 사수로 배치 받았는데 용케 그해 추수감사절이었던 11월24일까지 부상 한번 당하지 않고 북한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었다.
같은 달 27일, 평안북도 운산의 한 고지에 구축한 참호 속에서 대기 중 갑자기 나팔소리와 함께 중공군의 포격이 시작됐다.
기관총의 총열이 벌겋게 달아 오르도록 쏘아댔지만 개미떼처럼 기어오르는 중공군을 막을 순 없었고 탄약이 떨어지자 야전교범에 따라 기관총을 해체해 부품들을 여러 곳에 나눠 버린 후 적군의 포로가 됐다.
당시 니시모토씨 외에도 포로가 된 동료들이 여럿이었는데 북한군은 부상병들을 모조리 사살해 버린 후 남은 병사들을 북쪽으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평안북도 압록강변에 위치한 벽동 제5포로수용소에 도착할때까지 음식을 전혀 공급받지 못했고 허기에 지친 포로들은 강냉이와 밀 한줌씩을 얻어 먹을 수 있었다. 포로생활 첫 해인 1950년의 겨울, 여름 군복 하나만을 입고 영하 20-30도를 넘나드는 혹한을 견디어야 했다.
수용소라고 해 봐야 민가의 방 한칸에 30-40명의 포로들을 쓸어 넣은게 전부 였는데 너무 추워 양팔로 무릎을 감싸고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여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때 많은 포로병들이 폐렴에 걸려 죽어갔었고 북한군은 병 확산을 막기 위해 한번 들어가면 다시 살아나올 수 없다는 ‘죽음의 집(death house)’로 격리 수용했다. 니시모토씨도 굶주림과 혹한으로 병에 걸려 다른 이들과 함께 격리 병동으로 보내졌다.
이들에게 지급된 것은 흰색의 가루로 된 약 뿐이었는데 아스피린이 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때 벽동 수용소에는 5,000여명의 UN군 포로들이 구금되어 있기도 했는데 수많은 포로들이 질병과 굶주림 속에서 죽어갔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수십구의 시신들이 ‘죽음의 집’ 앞에 널려 있기도 했고 압록강변의 눈 속에 가매장되었던 시신들이 불어 오른 강물에 떠내려 가는 모습이 목격되는등 그야 말로 지옥과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어느 날 왠 중공군 소속 군의관이 병실로 들어왔다. 동양계인 니시모토씨를 알아보았던지 중공군소속 군의관은 유창한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고 몰래 페니실린 주사를 한대 놓아주었다. 그리고 니시모토씨는 살아 남았다.
올해 81세인 니시모토씨는 당시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미 육군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고 있으며 신장부전증으로 4년동안 인공투석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러나 부작용으로 하루에도 수차례씩 설사와 복통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중 오는 9일 포로 및 실종자 기념행사를 생애 마지막 행사로 여기고 열심히 준비 중이었다. 그는 주치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입원치료를 버티다 하루 1알만 복용해야 하는 수면제를 3알이나 먹고 응급실에 실려가 반 강제적으로 입원하게 되어 결국 4월9일 행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에밀 카파운 신부(Emil Kapaun)
닉 니시모토씨의 포로생활은 물론 한국전쟁 포로들에게 잊을 수 없는 정신적인 지주를 빼 놓을 수 없다.
전쟁포로를 위한 정신적 위안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친 에밀 카파운 신부가 바로 그 주인공.
한국전 포로들 중 북송과정에서 거동이 불편한 부상병들은 행군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사살되곤 했는데 이때 적군의 총구를 몸소 막아서면서 많은 부상포로들의 목숨을 건진 에밀 카파운(당시 제1기갑사단 8연대 소속, 대위) 신부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많은 부대원들을 잃고 군의관 앤더슨 대위와 더불어 40여명의 부상자들에게 응급조치를 취해 오던 중 연대본부가 파견한 두 분의 구조를 위해 파견한 집 차를 성공적으로 출발시킨 후 자신은 포로가 되어 니시모토씨와 같은 벽동 포로수용소로 보내졌었다. 한번은 적군들이 감추어 둔 감자를 몰래 빼내어 포로들에게 먹였다가 이 같은 사실이 발각돼 카파운 신부에게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파 물을 부은 후 그 곳에 맨발로 얼음위에 서 있도록 했으나 서슴없이 얼음위에 올라선 그의 모습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지기도 했다고 한다.
카파운 신부는 ‘죽음의 집’에도 수시로 드나들며 죽어가는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다 결국 자신도 병에 걸려 한 많은, 그러나 성직자로써 후회없는 삶을 마치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한국전 발발 60주년을 맞아 카파운 신부에게 명예훈장(Medal of Honor)를 추서 할 계획이며 바티칸 교황청에서도 그의 업적을 인정하고 성자의 반열에 올리기 위한 조사에 착수한 상태이다.
클라렌스 영
(Clarence Young)
클라렌스 영 하사는 6.25 발발 당시 하와이 스코필드 병영 내 제5전투단 소속으로 긴급 소집돼 1950년 7월20일 새벽 하와이를 출발, 8월1일 부산항에 도착하자 마자 마산지역 전투에 참가했다. 클라렌스는 다음해 4월 포로가 된 후 어느 이름 모를 시골 창고에서 손발이 묶인채 감금된 적이 있었는데 함께 있던 한 포로 중 계급장도 없이 누추한 군복에 수염이 덥수룩한 아주 초라하고 늙은 포로를 목격했다고 한다.
얼마동안 목욕을 안 했는지 냄새가 진동하는 노인에게 “당신은 나이도 꽤 많은 거 같은데 어쩌다 이 곳에 잡혀 온 거요?”라고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남루한 노인은 “나는 24단장의 딘(Dean) 소장이오”라고 대답했다는 것.
클라렌스는 어의가 없다는 듯이 “농담도 심하군요, 당신이 별이 두개면 난 셋이요”라며 웃자 그 힘없는 노인도 함께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고 한다.
1953년 9월11일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일본의 생환포로 대기소로 보내졌고 어느날 식당에 모여 잡담을 하고 있던 중 2성장군 하나가 여러 보좌관과 함께 나타나 포로들과 악수를 나눴다.
그러다 그 장군이 클라렌스의 손을 다시한번 꼭 잡더니 “장군, 안녕하셨습니까?”라고 말하자 어리둥절해진 그는 말을 잇지 못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포로생활 당시 만났던 그 노인이 정말 장군이었다는 것. 며칠 후 클라렌스는 딘 소장의 배려로 특별기를 타고 하와이로 귀환했고 히캄 공군기지에 도착하자 장군과 함께 내려 의장대의 사열까지 함께 받았다고 한다.
클라렌스 영 사하는 트리플러 육군병원 내 ‘나이든 재향군인을 위한 시설’에 입원해 요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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