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추방 안됐다면 지금도 한국에 살 것”
멘도시노.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로 약 3시간30분. 101번 하이웨이-128번 국도-1번 해안도로로 ‘돌아가는 지름길’을 이용할 때 걸리는 시간이다. 멘도시노가 북가주 한인들에 게 친숙하게 된 매개는 전복이다. 철이 되면 전복잡이를 하러 그곳으로 내달리는 한인들이 꽤 있고, 이들의 입담과 초대형 전복을 통해 멘도시노는 알음알음 더 알려지게 됐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휴양도시 멘도시노에 아주 특별한 코리안이 산다. 핏줄의 코리안은 아니다. 연줄의 코리안이다. 브루스-조이스 테일러 부부다. 각각 91세, 86세인 노부부는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바다 너머 머나먼 코리아를 늘 가슴에 품고 산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묘소가 서울 양화진에 있고, 나도 서울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까. 사람들한테 저 바다 너머 내 고향 한국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해요. 1942년에 (일제에 의해) 부모가 추방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한국에 살고 있을 거요.”(브루스)
거실에도 한국냄새가 물씬하다. 한쪽벽에는 삿갓을 쓴 코리안의 인물화가, 맞은편 벽에는 무엇인가 이고 서울 어느 도성문으로 걸어가는 치마저고리 차림 아낙네 그림이, 바다쪽 창문 위에는 1920-30년대 서울전경 사진이 걸려 있다. 칠기교잣상도 있다.
“언제는 동양인부부를 보고 어디서 왔냐고 물었지, 코리안인지 일본계인지 보면 알거든. 말해도 모를 거라는데 재차 물으니 코리아라는거라. 남이냐 북이냐니까 놀라면서 남편이 사우스라 해서 내가 서울태생이라니 더 놀라더군. 이북 출신이라는 부인에게 어디냐니까 정말 모를 거라면서 (평북) 운산이래요. 운산에도 우리집이 있었다니 기겁을 하더라고, 허허.”
1890년대 중반부터 코리아에 살다 1908년 숨진 그의 할아버지(조지)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코리아에 묻히겠다며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들어 있다. 1942년 일제의 강제추방으로 캘리포니아에 머물다 1948년 숨진 그의 아버지(앨버트)도 다른 데서 죽더라도 코리아에 묻어달라는 유언대로 양화진에 묻혔다. 그의 어머니(메리)는 한국살이 추억이 가득한 자서전을 남겼고, 그 또한 지난해 한국사랑 진진한 자서전을 냈으며, 4대째인 딸(제니퍼)은 할머니의 자서전 등을 토대로 영화나 TV드라마를 만들 계획이고….
테일러가의 근 120년 한국인연담은 5시간이 넘는 2차례 인터뷰(10일과 13일)로도 부족했다. 수차례 전화와 e-메일이 오갔다. 확인해야 할 자료도 방대했다.
조지, “웨스트민스터보다 코리아에…”
앨버트-브루스 부자와 3.1독립선언서
3.1운동 전날인 1919년 2월28일, 서울역 맞은편 세브란스병원(현 세브란스빌딩 자리)에서 파란눈의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앨버트-메리 테일러 부부의 첫 아기였다. 앨버트는 광산업과 무역업을 하면서 AP통신 특파원을 겸했다. 그해 1월 승하한 고종황제 장례식이 다가오는데다 고종독살설이 퍼져 민심이 들끓던 즈음이었다. 메리 테일러의 자서전 ‘호박목걸이(Chain of Amber)’는 당일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바로 그날 첫아들이 태어났다. 나는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사람들은 속삭이다가 고함지르고 쿵쾅쿵쾅 뛰어가다 조심조심 꼿발로 걸어가는 일들이 반복됐다. 나중에 내 방에 사람들이 숨어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니 간호사가 아이가 아니라 종이뭉치를 든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것을 내 침대보 밑에 밀어넣었다…(중략)…
병실이 어둑해질 무렵 잠에서 깼다. 앨버트가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내게 키스하고 남편은 어색하게 아이를 안다가 침대 밑에 숨겨진 종이뭉치를 발견했다. 그는 갑자기 아기를 내려놓더니 급히 희미한 빛이 남은 창가로 가 문서를 읽었다. ‘이건 독립선언서잖아!’ 그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장담컨대, 그날 밤 신참특파원 앨버트는 자기후계자 첫아들이 태어난 것보다 독립선언서를 발견한 것에 더 흥분했다. 그날 밤 앨버트는 동생 빌에게 독립선언서 사본을 구두 뒤축에 숨기고 서울을 떠나 도쿄로 가게 했다. 선언서 발행금지조치가 내려지기 전에 앨버트가 쓴 기사와 함께 미국으로 전송하기 위해서였다.”
독립선언서는 이렇게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당시 세브란스병원은 기독교계 독립지사들의 아지트 중 하나였다. 그날의 신생아가 브루스 테일러씨다.
“참 특이한 인연 아닌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첫날 그런 역사적인 문서를 깔고 있었다는 건. 그게 아버지를 통해서 바깥세상에 알려지게 됐다는 것도 그렇고. 또 있어요, 내가 태어난 곳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로 그 병실이었지 뭐요.”
1908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숨진 조지 테일러(1829~1908)는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선대는 스코틀랜드계 영국인으로 아일랜드총독을 지냈다 함) 금광개발업자였다. 버지니아 캘리포니아 알래스카 등지에서 주로 자본가가 아니라 기술자로서 노다지사업을 한 그는 1896년(또는 1897년) 코리아에 첫발을 디뎠다. 60대 중후반 조지 테일러의 코리아행에는 역시 광산기술자였던 두 아들(앨버트와 윌리엄)이 따랐다. 부인과 딸은 미국에 남았다. 일가친척들은 주로 샌프란시스코 등 미 서부나 영국에 살았다.
조지 테일러의 방한시기와 관련해 손자 브루스씨는 “1894년에 코리아에 가 (주)동양광업개발을 설립해 운산에서 금광사업을 했다”고 했다. 다른 문헌에 따르면, 운산금광개발권은 명성황후 후광을 업은 알렌(외교관이라 수익사업 불가)의 주선으로 1895년 모스라는 자본가에게 넘어갔고, 모스는 1897년 이를 헌트라는 자본가에게 넘겼다. 헌트(자본가)와 조지 테일러(요즘식으로 동업자 겸 기술사장) 등이 만든 회사가 동양광업개발이다. 조지 테일러가 고종 집무실에 전기기설을 해준 것을 계기로 금광개발권을 따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게 맞다면 그는 1896년 이전에 방한해 모스 등과 함께하다 동양광업에 합류했을 것이다.
운산금광은 세계3대 금광으로 꼽혔다. 금이 쏟아진단 소문에 사람들이 몰렸다. 회사측은 철조망에 ‘No Touch’라는 팻말을 붙였다. 사람들은 그게 금맥/금광을 뜻하는 줄 알았다. 국산영어 노다지의 유래다.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이 금광3부작(금 따는 콩밭/노다지/금)을 쓴 데서도, 1930년대 노다지열풍 때 그 자신이 한동안 소설쓰기 대신 운산광부로 일한 데서도, ‘금노다지타령’(1936년)에 이어 “노다지 노다지 금노다지”로 시작되는 ‘눈깔 먼 노다지’(1939년)란 노래가 유행한 데서도 구한말~일제하 금광사업이 어땠는지 읽혀진다.
당시 외국인 사업가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있다. 아들의 결혼 전에 사망한 바람에 며느리(메리)나 손자(브루스)의 자서전에 이들이 목격한 조지 테일러의 한국사랑 행적이 담길 수도 없었다. 그의 한국사랑을 짐작케 하는 건 묘지석이다. 재력 인맥 혈통 등에 비춰 얼마든지 미국이나 영국(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 포함)에 묻힐 수 있었을 그는 코리아를 택했다. 묘지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묻히기보다 이곳 코리아에 묻히기를 바라노라. 비전의 남자, 코리아의 친구, 조지 테일러.”
“내가 죽거든 사랑하는 코리아에”
◇앨버트(1875~1948)-메리 테일러(1889~1982)
조지 테일러 사후 광산업은 두 아들(앨버트와 윌리엄)이 이어받았다. 형제는 또 무역회사를 차려 자동차 등을 수입해 팔았다. 형 앨버트는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AP통신 특파원을 겸했다. 기자로서 그의 업적 중 하나는 앞서 다룬 3.1운동 독립선언서 특종이다. 제암리사건 특종도 중요하다. 3.1운동 달포후 1919년 4월15일, 수원군(현 화성군) 제암리에서 일본군경은 만세운동 강경진압을 사과하겠다며 15세이상 남자들을 모이게 했다. 그리고는 총격과 방화. 그날만 20여명이 죽었다. 집 42채 중 38채가 재로 변했다.
다음날 인근을 지나다 알게 된 앨버트는 동행자들(언더우드, 스코필드, 커티스)과 함께 현장을 방문, 샅샅이 취재해 보도했다. 이들은 총감부에 찾아가 항의도 했다. 그의 보도는 일부 일본인들까지 움직였다. 한 목사는 규탄시를 발표했다. 수십년 뒤에도 몇몇 일본인들이 사죄성금을 냈다. 이는 1970년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건립에 쓰여졌다. 기념관에는 한글과 영어로 “A.W. Taylor: 프리랜서 기자로 3.1독립운동 당시…1919년 4월16일, 제암리사건 현장을 취재한 그의 기사가 보도됨으로써 일본에 사건진상이 알려졌다”고 적혀 있다.
1917년 결혼한 테일러 부부는 소공동에 살다 1923년부터 1년간 서대문구 행촌동에 3층짜리 붉은 벽돌집을 짓고 신혼여행지 인도북부에서 본 궁전이름(딜쿠샤/희망의 궁전)을 붙였다. 배우 출신 메리는 글과 그림 솜씨도 뛰어났다. 딜쿠샤에 살 때(1924~1942)는 물론 미국에 살 때(1942~1982)도 그는 한국에 관한 많은 그림과 글을 남기고 한국의 역사문화 강연을 자주 했다. 글은 사후에 자서전(Chain of Amber/호박목걸이)으로 나왔다.
1941년 12월8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태평양전쟁은 테일러가의 한국살이에 태풍을 몰고왔다. 앨버트는 서대문형무소에 6개월간 수감됐다. 1942년 5월 석방직후 추방됐다. 캘리포니아에 머물며 코리아행을 기다리던 그는 1948년 숨졌다. “행여 다른 곳에서 죽거든 유골을 사랑하는 코리아로 가져가 아버지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받들어 그의 부인은 우여곡절끝에 샌프란시스코발 군함을 얻어타고 한국으로 가 남편의 원을 풀어줬다.
◇브루스(91)-조이스 테일러(86) & 자녀들
할아버지가 숨진 병실에서 독립선언서와 함께 태어난 브루스씨는 진주만 기습일과도 기연을 갖고 있다. 아버지의 투옥과 추방으로 연결되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바로 그날, 아들은 그 전쟁이 시작된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는 1940년 광산기술 공부 등을 위해 미국에 왔다 전쟁통에 자원입대한 터였다. “새떼가 날아오는 것 같더니 마구 폭격을 해대는데…”
서울태생 미국인 브루스씨의 부인 조이스씨는 대만태생 영국인이었다. 아버지는 주타이완총영사에 이어 주코리아총영사를 지냈다. 부모끼리 절친해 둘은 어려서부터 어울렸다. 1929년 열살소년 브루스가 영국유학을 가면서 헤어진 둘은 1936년 서울에서 재회했다. 그해 십대소녀 조이스가 영국으로 떠나 둘은 또 헤어졌다. 삼세번 만남은 1948년 성탄연휴 때였다. 제대군인 브루스와 조이스 아가씨의 만남은 이성교제가 됐다. 1950년 7월1일 결혼했다. 이들은 결혼준비 중 한국전 발발소식을 BBC를 통해 들었다.
3대째 광산기술자가 되려다 진로가 바뀐 브루스씨는 제대후 30년간 교사생활을 했다. 그는 90세 기념으로 작년 봄 자서전 은행나무옆 딜쿠샤(Dilkusha by the Gingko Tree)를 펴냈다. 은행나무는 임진왜란의 명장 권율 장군(1537~1599)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1남1녀를 뒀다. 엘세리토의 아들(피터,54)은 ABC방송 기술직원이다. 주로 티뷰론과 멘도시노의 작업실에 머물며 부모집을 오가는 딸(제니퍼,51)은 콜라주 아티스트다. 수차례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고 작품집을 냈다. 3대로 끊길 뻔한 테일러가의 한국인연을 4대째로 잇는 이는 딸이다. 그는 테일러가 이야기를 영화나 TV드라마로 만들 계획이다.
◇수십년만의 한국방문, 명예서울시민 위촉
브루스-조이스 테일러 부부는 딸 제니퍼씨와 함께 2006년 1월말~2월초 열흘간 한국을 방문했다. 브루스씨는 66년만에, 조이스씨는 70년만에, 제니퍼씨는 난생처음이었다. 사연을 알게된 한 영화인이 다리를 놨다. 이들은 양화진묘지 제암리기념관 서대문형무소 등을 둘러봤다. 열댓세대 보금자리로 변한 ‘은행나무옆 딜쿠샤’도 들렀다. 은행나무는 보호기념물이다. 변두리도 삼사십년 전 흔적이 드물 만큼 달라졌지만 딜쿠샤는 도심에 가깝고 낡은데도, 밑으로 지하철이 지나는 바람에 철거를 면했다. 브루스씨는 “(1988년) 올림픽 같은 때 서울풍경이 TV에 비치면 어릴 때 오르내린 산들은 어떻게 됐나 살펴보곤 했다”며 “엄청난 변화에도 딜쿠샤가 살아남아 감회가 새로웠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가 남긴 귀한 사진과 그림들을 서울시에 기증했다. 이명박 시장은 명예서울시민증으로 화답했다. 테일러가 이야기는 그해 KBS의 3.1절 특집으로 방영됐다. 기증품은 서울역사박물관이 발간한 ‘…서울회상’ 초반부를 장식하며 사료에 편입됐다.
한국으로 갈 때 브루스씨는 멘도시노 어머니묘소의 흙을 가져가 서울 아버지묘소에 뿌렸다. 미국으로 올 때 그는 서울 아버지묘소의 흙을 가져와 멘도시노 어머니묘소에 뿌렸다. 그를 보고 조이스-제니퍼 모녀는 눈물을 뿌렸다.
“자녀에 한국말 쓰세요”그밖의 여운 & 취재후기
◯…가족사에서 역사로, 지질에서 교육으로, 사통팔달 이어진 브루스 테일러씨의 이야기 중 추리고 추린 메인스토리 말고도 그의 한국사랑이 순백임을 느끼게 한 대목은 많았다.
“내가 선택한 나라는 코리아(My chosen country is Korea)”라면서 “Chosen(choose의 과거분사형)은 일본어로 조센(조선), 즉 코리아”라고 풀어준 우스개, 문득 기자에게 아이들이 한국을 사랑하는지 한국어를 잘하는지 물으면서 “집에서 아이들과 대화할 때는 한국어를 쓰라”는 주문, 인터뷰 뒤 일어서는 기자에게 인근 길 이름을 가르쳐주며 “거기 코너에 코리안이 가게를 하는데 하도 부지런해서 꼭 볼 것이니 만나고 가라”는 권유 등등.
“약 40개국을 다녀봤고 10개 언어에 ‘노출’됐다”는 그는 “영어가 참 괴팍한 언어”라고 전제한 뒤 특수배경음악 등으로 집중력을 높여주는 “AIM(Accelerative Introductory Method) 기법을 30분만 해봐도 효과를 본다”며 “한국의 영어교사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빈 말이 아니었다. 인터뷰 뒤 보내온 이메일을 통해서도 그는 “내가 태어났고 내가 좋아하는 땅에 대해, 그곳을 위해 뭔가 하고 싶었던 코리아에 대해 다시 얘기하게 돼 기뻤다”며 “한국의 영어교사들과 연결된다면 이 기법을 가르쳐주겠다. 나도, 세계의 수많은 교사들도 그 덕을 많이 봤다”고 덧붙였다. 관련문의는 이메일(tickell@mcn.org)로 하면 된다.
지난해 봄 90세 기념으로 낸 그의 자서전 은행나무옆 딜쿠샤(DILKUSHA BY THE GINKGO TREE)는 아마존(amazon.com)이나 트래포드출판사(Trafford.com)에서 구할 수 있다. 그의 이름(Bruce Tickell Taylor)으로 검색해도 된다.
◯…딸 제니퍼씨(사진)는 “여행다닐 연세는 지났지만 아버님은 꼭 가고픈 마지막 나라를 고르시라면 코리아라고 하신다”며 “살아계실 때 작품을 마무리짓고 싶다”고 말했다. “코리아에 대해 전에도 들었지만 할머님 자서전을 읽고 너무 감동을 받아 같은 이름의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다”는 그는 “3명이서 추진중인데 TV드라마로 바꿀까 하는 말이 오가고 있다”고 했다. 방향이 확정되면 이들은 한미합작프로덕션 설립과 배우섭외 등을 거쳐 내년에 한국에서 촬영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관심있는 이들은 제니퍼씨에게 연락(jtaylor@mcn.org)하면 된다. <정태수 기자>
사진/ 2006년 방한 때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는 테일러 패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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