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 탕자(蕩子)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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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 have a feast and celebrate.
For this son of mine was dead and is alive again;
he was lost and is found.
우리 다 함께 잔치 벌여 경축하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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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불경에 나란히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는 실로
폐부를 관통하는 감동적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우화(寓話)가 그렇듯, 너무 따지고 들면 얘기의 중심부를
벗어나기 쉽습니다. 우화는 우화입니다. 듣고 이해하는 이의
진화 수준에 따라 해석 될 뿐입니다. 그래서 우화입니다.
A parable is a story which is realistic but usually made-up,
intended to convey a moral or religious lesson. ‘패~러블’이란
그럴 듯하지만 지어진 얘기로서 뭔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레슨을
전하기 위함이 그 목적이다. 영어사전은 ‘parable’[우화]을 그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이솝 우화집’을 연상하면 이
정의에 공감하게 됩니다.
한편,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케하는 플라톤의 ‘동굴 우화’는
’parable’이라 하지 않고 흔히 ‘allegory’ [앨~러고리]라 합니다.
풍유(諷諭) 또 어떤 경우엔 은유 (a metaphor)로도 넓게
이해되는 단어 ‘allegory’는 ‘패~러블’이란 말처럼 뭔가
의미 있는 가르침을 상징적으로 전하는 점에서 거의 같은데,
다만 상상력의 범위가 좀 더 넓은 편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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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 have a feast and celebrate.
For this son of mine was dead and is alive again;
he was lost and is found.
우리 다 함께 잔치 벌여 경축하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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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what does it say?
얘긴즉슨, 어느 잘 사는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지요.
그 중 둘째 아들은 일찌감치 자기 몫의 유산을 받아 집을
나갑니다. 영어 단어 ‘prodigal’ [프라~디글]이 뜻하는 대로
낭비벽이 심하고 [wasteful] 방탕한 [heedlessly extravagant] 삶을
살던 아들은 결국 거렁뱅이 신세가 됩니다. 헐벗고 굶주린 삶에
지쳐 이젠 아버지께 죄를 고하고 어떻게든 목숨이나마 연명하려고
그야말로 처절한 신세로 귀가하게 됩니다.
멀리서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피골이 상접한 몰골의 아들을 본
아버지, 황급히 맨발로 달려 나가 불쌍한 ‘탕자’ 아들을 힘껏 두 팔로
감싸 안으며 환희에 넘치는 목소리로 하인들께 이릅니다. "자,
내 아들이 돌아 왔다. 가장 살찐 송아지를 잡아 우리 모두 먹고
마시며 경축하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두번째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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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 have a feast and celebrate.
For this son of mine was dead and is alive again;
he was lost and is found.
우리 다 함께 잔치 벌여 경축하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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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寓話)을 듣고 그게 뭐냐고 피식 웃어 버리면 우화는 그만
싱거운 소설이 되고 맙니다. “아, 그거, 용서와 회개 뭐 그런
얘기잖아? 알아, 안다고. I KNOW! 근데 그게 쉬운 일인가? 말은
쉽지. Easier said than done!” 그렇게 다 아는 척 넘기면, 맥 빠진
우화는 그저 한낮 주간지 유머 난에 실린 실소 부스러기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렇다고 또 너무 진지하게 말 하나 하나를 토씨까지 따지며
해석하는 것도 우화를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아닙니다.
우화(寓話) 한 토막에 마치 천지신명의 거대한 메시지가 몽땅
다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동서고금을 통해 그토록 잘 알려져 사람들 입에 널리
회자되는 이 ‘탕자의 비유’는 과연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걸까요?
죄를 고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면 너그러운 아버지의 따스한 용서가
기다리고 있다는 뜻일까요? 죄 사함을 받으려면 철저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함을 따끔하게 가르치는 경종의 소리가 들리나요?
아님, ‘본래 죄없음’으로 계신 아버지는, 아버지처럼 본래 죄없는
아들의 그 어떠한 죄책감도 용서의 전제로 내 세운 바 없으며,
나아가, 아들의 ‘본래 죄없음’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방편으로
성대한 잔치를 통해 온 누리에 아버지와 아들의 ‘다 함께 본래
죄없음’을 현현키 위함이 이 우화의 정체이던가요?
우화(寓話)의 진정한 매력은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너그러움,
그 시원하게 열린 시공 너머의 차원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탕자의 비유’ 우화 한 토막이 아직도 우리 주위의
‘거룩한 화제’로 여전히 신성하게 남아 있는 게 아닐까요?
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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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for the Soul 지난 글들은 우리말 야후 블로그
http://kr.blog.yahoo.com/jh3choi [영어서원 백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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