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군을 피해 떠나면서 어머니께 사흘만에 돌아오겠다는 약속 못지킨 아픔 책으로 출간.
청진의과대학 재학중 6,25 동란이 일어나자 수색대 중사로 27개월간 참전
1) 정동규 박사와 나
남가주 롱비치 병원에서 심장전문의로 활발히 일하시는 정동규 박사는 78세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청년같으시다. 내가 그의 자전서 "3일의 약속 (The Three Day Promise)”을 처음 읽은 게 근 20여년 전이다. 그가 18살 나던 1950년, 공산군을 피해 급히 고향을 떠나면서 어머니께 사흘만에 꼭 돌아오리라 약속했지만 끝내 돌아가지 못한 아들의 통한(痛恨) 을 그린 자서전이다. 이 책은 한국전쟁의 역사적 증언이자, 우리가족같은 천백만 이산가족들에겐 동병상련의 위로를 안겨준 육필친서 같기도 했다.
내가 처음 정 박사님을 만난 건 1995년 여름 백악관 정원에서였다. 당시 잊혀진 전쟁 6.25를 재조명하고, 참전기념비를 링컨 기념관 옆에 세우는 캠페인이 미 의회의 후원으로 벌어질 때였다. 절친했던 칼스테이트 대학 사회학과 고 송영인 교수의 권유로 기금사업팀에 동참, 1년여의 각고 끝에 백만 불 모금을 달성하고 송 교수와 헌정식에 초청 받았었다.
정 박사님은 자서전 판매전액인 $450,000을 따로 기증하신 터였다. 최대 개인 기부자로 백악관 기념전야제에 주빈으로 오셨는데, 기념사업 위원장 스틸웰 퇴역 4성 장군과 나란히 서 계신 그에게 그의 책, ‘3일의 약속’을 들고 다가갔었다.
나는 4백 쪽이 넘는 그의 책을 단숨에 읽고, 깊은 감동과 흥분 속에 몇 일 잠을 설친 사정을 말씀드렸다. 애끓는 사모(思母)의 정과 전쟁통에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자취들을 생생하고 박진감 있게 써 내려간 글에서 우리 어머니 같은 생이별 희생자들의 한 많은 삶을 낱낱이 대변해주신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렸다.
그의 입지전적 생애는 우리 한인교포들에게 큰 귀감이었다. 전쟁통에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29세에 도미하셨음에도, 타고난 재능과 불굴의 투지로 미 전문의의 꿈과 함께 유려한 영문으로 자서전 출판까지 하신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책 판매의 돌파구를 만든 그의 지혜였다. 탈고 후 아무 출판사도 받아 주지 않자 미 전국 1200개 신문에 9천5백만 독자를 가진 ‘디어 에비’칼럼리스트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에비씨는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 하루 수만 통의 편지와 책 주문이 쇄도했다. 그리고 전액을 한국전기념비 건립에 기부한 것이다.
좋은 인연은 돌아서 찾아오는 것일까? 이년 전, 롱비치 병원에서 심장수술을 받은 어머니가 주치의로 선정 받은 분이 정 박사님이셨다. 청년처럼 밝고 적극적인 성격은 여전하시다고 한다. 어머니는 요즘도 박사님께 정기 진료를 받고 고향얘기 나누고 오시는 게 큰 행복이시다.
올해 6.25 60주년을 맞아 한국 KBS 방송에서 특별 회고담 청탁을 받으셨다. 그 원고를 샌프란시스코 한국일보에 동시개재하게 되었다.
2) 정동규 박사의 한국전쟁 60년의 회고
한국전쟁 혹은 6.25 사변이 터진지 꼭 60년이 되었다. 아아 어찌 잊으랴… 고향을 떠나면서 어머니께 사흘만에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난 지 60년이 되었건만 돌아가지 못했다. 그 참혹했던 민족상쟁을 잊지말고 계속 후대에 남겨야한다고 믿는다. 이번 60주년을 맞아 내가 겪은 6.25를 서울의 국민들과 미주동포들을 위해 다시 증언한다.
전쟁의 조짐과 그 전주곡
가설무대 / 1948년 늦은 봄, 청진 의과대학 학생들은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선거 운동을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은 길가에 나무로 지은 가설무대 앞에서 수없이 불렀던, 그 노래 때문일 것이다.
43년이 지난 1991년 “삼일의 약속”(KBS드라마 50회) 종영을 축하하기위한 KBS 초청으로 서울에 갔을 때, 청진의과대학 친구 원 ** 박사를 만났다. 그는 일찍 서울로 내려와 서울 의과대학(1955년)을 졸업했고, 인천에서 산부인과를 개업하여 오늘까지도 성업 중이라 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타국 같은 서울에서 동창을 만나니 학창시절의 추억이 절로 난다. 그때의 이야기와 함께 열창했던 그 노래는----
“만주벌 눈바람아 이야기 하라 / 밀림에 긴긴밤아 말 물어 보자 / 만고에 빨지산이 누구인가를,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 아.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당시, 1948년8월25일 북한에 선거가 있었고 김일성이 공산당 수장으로 당선 되었다. 두주 후,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생겼다. 이때를 시발로 하여 김일성은 소련의 철권 통치자 스탈린식의 사회주의를 확고하게 다져가고 있었다. 한편으론, 남조선 해방이란 미명아래 전쟁의 준비를 일반 국민에게까지 파급되기 시작했다.
이후 1949년 9월 제2학기가 시작될 무렵, 북한 체제변화의 물결은 대학 사회까지도 밀어 닥치기 시작했으며, 그때 강 **현역 중위가 청진의과대학교 군사훈련 담당 장교로 인민군에서 파견되어 왔다. 군사 훈련은 비가 오나 바람이부나 태양이 이글거리는 혹서의 뙈약 빛 아래서나 매주 어김없이 실시되고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면, 진흙을 파고기는 포복훈련이 실시되었다. 그럴 때마다, 지금은 전시체제도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도 4년이나 지난 오늘, 국제 정세도 안정이 되었는데, 왜 의과대학생들까지도 이토록 맹렬한 군사훈련을 받아야하는 이유를 몰라 의아해 했다. 그때까지, 나와 학생들은 군사 훈련이 동족상잔의 피를 부르는 준비훈련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군사훈련과 다른 과목까지도 열심과 노력을 다했다.
한편 1950년 봄, 3학년 학생6명이 평양에 생긴 인민군군의관 학교에 자원 평양으로 떠났다. 불과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중 한명이(맹 **) 인민군장교 복장에, 목이 긴 검정색 군화를 신고, 중위 계급장을 어깨에 달고, 허리에는 가죽벨트를 단정하게 메고 모교를 방문했는데, 참 멋있어 보였다. 그사이 1950년 6월 초에 있었던 시험에서 나는 우수한 성적을 받아 매우 만족했다.
30년이 지난 훗날, 로스앤젤리스에서 맹 선생을 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때의 맹 선생의 회고는 “ 평양으로 간 후 몇 주간, 고된 훈련을 받은 뒤 장교가 되어, 대부분 38선 일대에 집결된 보병부대에 배속 되었고, 일부는 후방 군 병원에 배치되었다 ” 고 술회 하였다. <계속>
사진 설명
1951년 육군 제23연대 수색대 소속으로 형리전투에 참전한 정동규 중사
1960년 수도의과대학 수석 졸업
1965년 미조리에서 신부 정영자와 결혼 당시 모습
1983년 고향떠난지 33년만에 북한을 방문,어머니 묘소앞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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