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동란 60주년 특집
▶ 김 희봉 (수필가)
6월들어 특수임무자이외 모든 인민의 기차여행 전면 중단
북한측은 리승만괴뢰군대가 북반부를 침공했다고 특별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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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이 무너지고 인민군은 서울을 초토화하고 남진을 계속
어머님에게 ‘3일이면 돌아오갰다”고 말한후 피난대열로 남하
조직적 군사 훈련
청진 역 / 주말이면, 어머님이 계시는 주을 집으로 가기위해, 청진 역을 향해 바쁘게 달려갔다. 그때 청진 역에는 수많은 군인들이 어디론가 이동하기위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청진 역 화물차 안에는 많은 군대용 군마(軍馬)가 실려 있고, 억세고 사납게 보이는 병사들이 우굴 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중, 중국 공산당 부대에 배속되어 일본군과 싸운 병사들이며. 8.15 해방 후에는 모택동 산하의 인민해방군으로 장개석 국민군과 싸워 중국 대륙을 공산화 시킬 때 까지 전투경험을 풍부하게 쌓은 역전의 전투 용사, 즉 조선족 군인들이다. 4월부터 6월 중순까지, 청진 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일이, 전쟁의 조짐인 것을 누가 짐작이나 했겠나. 아마도 김일성은, 6.25 전쟁 준비를 위해 이런 전투 경력자를 근간으로 인민군을 조직하였을 것이다. 그때 북한용어로는 “전쟁을 위해 다그쳐 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인민군은, 사단 규모이상의 군인들에게 공세적 기동훈련을 수차에 걸쳐 실시했고, 소련 군사 고문단들은, 조직적인 군사훈련을 시킴과 동시에 소련제 무기로 바꾸어 인민군의 전력을 크게 증강 시켜 나갔다. 그로인해 인민군의 병력은 182,680 명의 보병과 포병, 4,700명의 해군, 2,000명의 공군, 9,000 명의 해병대, 합 20 여만 명의 대군이 되었다. 또한 장비 면에서는, 500여대의 T-34탱크와 장갑차, 200대의 YAK-P 전투기 그리고 30여대의 해군 정찰용 선박 등을 보유하고 있다고 * Joseph GC Golden 은 밝히고 있다. 한편, 38도선 5 Km 이내에 살던 모든 주민들을 후방으로 이동시키기를 3월 중순까지 완료했고, 6월에 들어서자 특수임무를 띤 사람들 외에는 모든 인민들의 기차 여행이 전면 중단 되었다. 당시, 강원도 고성에 살던 한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6월8일부터 군인과 탱크 대포와 차량들을 실은 기차가 38선 남쪽을 향해 계속 이동하였다고 했다.
한편 신성모 국방장관의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북한 인민군 병력이 38선 쪽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남침할 기색이 보인다고 발표 했다. 하지만 워싱턴 DC의 미국 정부는, 일본 동경에 주재한 미 극동사령관 맥 아더 사령관의 보고에 따라, 남한 침략의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다. 남한군의 지상병력은 98,000명이고, 전투 가능한 병력은 불과 65,000 명 정도였다. 또한 장비는 M1소총과 소수의 대포정도이고, 훈련은 미국 고문단에 의한 중대 규모였다.
더더욱, 남한의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은 6월 11일에 발표한 비상경고를 6월23일 0시 현재로 해제 명령을 내렸다. 다음날 6월 24일은 토요일, 미 고문관 사무실에서는 당번 대위한사람만 남기고 전부 일본으로 주말 휴가를 떠났다. 같은 날 저녁 7시, 부슬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 ,서울용산 육군 장교 구락부 개막파티가 시작 한국군 고위 장교와 소수의 미 고문관들은 술 마시고 춤추면서 흥겨운 행사를 하고 있었다. 파티가 끝난 뒤 남한군 고급 장교들은 서울 명동에 있는 나이트클럽으로 이동 2차파티를 25일 새벽까지 즐기고 있었다.
*KOREA The Untold Story of War / Joseph GC Golden 1982
동족상잔의 포성은 울리고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은 전쟁 도발을 위장하기 위한 기만으로, 1950년 6월 7일 남북한 동시 총선거 실시를 남한 측에 제시 했고, 6월 15일에는 최고인민회의를 서울에서 개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6월 22일 작전지시 제1호를 비밀리에 발표했다. 명령사항 은, 다음날 23일 정오까지, 각사단의 공격목표 및 작전지시의 준비 완료를 전 인민군에게 하달했다. 더불어 공격개시 암호는 유선으로는 “폭풍” 무선으로는 “333” 신호탄으로는 “ 붉은색” 으로 하여, 혼성 기동부대 훈련에 참여했던 모든 인민군대는 6월 23일 까지 38선 일대에 배치가 완료 되었던 것이다. 하루가 지나면 25일은 일요일이다. 그날 새벽 3시 30분쯤, 한반도에 깔린 안개는 풀 벌래 소리까지 어둠으로 묻히고 산천은 적막하기 그지없다. 아침은 아직 멀었는데, 숨죽이며 작전명령을 기다리는 인민군의 눈에는 살생의 빛이 타고 있었을 것이다.
드디어 침공을 알리는 작전명령 제1호 “폭풍”과 “333”이 38선 전 인민군부대에 하달되었다. 붉은색 신호탄이 터지고, 탱크의 굉음과 벼룩이 솟구치는 기세와 포성은, 저 고요한 아침의 나라 , 동방의 등불이라 했던 한반도에 피 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특별방송/ 한편 6월 26일 월요일 아침, 청진의과 대학 학생과 교직원 전원이 운동장에 모였다. 그것은 전체 조선인민에게 고하는 김일성 사령관의 특별방송을 듣기위해서다. 마침내 스피커를 통하여 흘러나오는 특별방송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친애하는 동포들!
매국역적 리승만 괴뢰군대는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 지역에 대한 전면적 침공을 개시 하였습니다. 6.25 전쟁은 남조선 리승만 정권의 북침 통일에 의해 유발된 것으로써, 인민군은 미 제국주의 앞잡이를 응징하고 남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반격했으며이 정의의 전쟁에서 소련과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 모든 나라들이 우리의 전쟁을 성원하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 할 것입니다.---(이 내용은 당시의 기록을 참고했다)
38선이 무너지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인민군은 서울을 초토화 시키고 남진을 계속했다. 그때 미국을 포함 유엔 16개국이 한국전쟁에 참전,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남쪽으로부터 서서히 동체를 보이기 시작한 B-29 폭격기들은 청진 시내에 폭탄을 사정없이 퍼 부었는데, 이때 폭탄 터지는 소리는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요란 했다.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고 해제되자, 청진의과대학 학생들은 적십자 표식을 팔에 달고 조그만 가방에 응급치료 장비를 넣고 불바다 가 된 청진 시내로 내려왔다. 시내의 모든 건물은 파괴되고 폭격에 맞은 자동차 덩어리들은 무너진 건물더미위에 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또한 수백 명의 노인과 젊은 사람 그리고 어린 아기까지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이광경은 최근 우리가 본 아이티의 처참한 지진상태와 같다. 더불어, 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황은 역전되었고, 9월28일 서울을 수복 하여 태극기가 서울 하늘에 나부끼게 되었다. 그로인해, 김일성은 해방 5주년 8월15일 까지 남한을 정복하려던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
징집영장/ 같은 해 9월 하순, 산천은 가을빛으로 무르익어 아름답기 그지없으나, 울리는 포성은 좀처럼 줄어들지 아니했다. 드디어, 나에게도 인민군 징집영장이 나왔다. 나는 내가 가장 존경하며 믿고 의지했던 경성의전 출신 명교수 김병우 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때 “ 정군, 지금 남조선 군인들과 미군들이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네 -- 자네가 일선에 배치되면 폭격에 맞아 죽을지도 몰라” 그 말을 하는 도중 수술실 간호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선생님과 헤어졌다. 그 후, 나는 시골 대향촌의 외할머니 집 곡간 장독 속에, 두 달 동안이나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11월21일 대한민국 육군 수도 사단 백골부대 18연대가 시골 동래를 해방 시켰다.
삼일의 약속/ 다시 전세가 기울어진12월 2일,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 오후 4시경, 어머님에게 “3일이면 돌아오겠습니다.” 하며 어머님을 껴안고 속절없이 울었다. 어머님은 내 외아들 동규, 동규하며 나와함께 눈물 흘리며 거리로 나왔다. 나는 우시는 어머님의 모습을 뒤로하고, 후퇴하는 국군과 함께 피난하는 피난민 대열에 끼어들었다. 3일이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였으나, 3일이 지났지만, 대한국군은 계속 남쪽으로 밀려 내려갔다. 발에 물집이 생겨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12월9일, 함경북도 성진까지 내려온 나는, 미군 수송선에 실려 포항 근방에 있는 구룡포 항에 도착했다.
6.25전쟁은 나에게 있어서 남북한 어느 쪽에도 옳다는 정당성이나 신념을 심어 주지 못했다. 다만 인민군의 징집을 기피한 죄로, 그들에게 잡혀 처형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국군을 따라 정처 없이 내려갔을 뿐이다.
다음날, 젊은이들은 구룡포 백사장에서 국군에 현지 입대하고, 걷거나, 가끔은 화물차에 실려, 12월 24일 밤 강원도 홍천에 도착 했다. 그날 밤은 빈 민가(民家) 에서 하룻밤 자고 25일 아침, 육군 23연대 본부로 이동, 콩나물국에 도시락밥을 먹은 다음 수색중대 1소대2분대에 배치되었다. 그동안 입고 있던 누더기는 벗겨지고 엷은 카키색 여름군복과 운동화 같은 신발과 소총을 지급받고, 불과 1시간정도 훈련 받음으로 전투군인이 되었다. 다음 26일, 그날부터 수색중대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계속>
사진설명-4매
죠지 부시대통령과 한국 전쟁기념비 건립준비 모임 참석
1990년 레이건 전 대통령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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