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동란 60주년
▶ 군번 없는 군인의 쓰라린 추억
암호 새어나가 인민군에 집중피격당해 부상당해
군번 없는 군인으로서 인민군과 수많은 전투치뤄
배고픔과 죽음앞에선 ‘먹고 ,살아야 한다’본능 같아
3년 1개월만에 휴전협정 조인, 비극과 상처남겨
나무지게 암호사건/ 군에 있어서 암호는 생명과 같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암호가 인민군에게 새어 나갔다. 그날 밤 암호는 “나무지게”다. 나는 2명1조로된 척후병이 되어 M1소총을 움켜쥐고 작은 언덕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그때, 인민군들에게, 집중사격을 당했고. 총알하나가 나의 철모를 뚫고 왼쪽 잔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상처를 남겼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날 밤 인민군들이 “나무지게” “나무지게” 하며 암호를 불러대자 밖으로 나간 병사들은 모두포로가 되어 잡혀가고, 나는 척후병으로 그 큰 위기를 면 할 수 있었다.
죽거나 도망치기 / 인민군 포로 중에는 15세 어린청년이 있었다. 그는 함북북청 출신 이다. 몇 날 그와 함께 병영생활을 같이했다. 어느 날밤 , 속초근처의 인민군과의 전투가 있었고 그는 머리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 때로는 포로 두 명을 데리고 소대 진지로 식량을 운반하는 책임을 지기도 했다. 임무수행 중 인민군 포로들과 정이 들 때도 있었다. 그들 중, 내 고향 에서 멀지않은 농촌에서 잡혀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가는 동안 정이 두터워진 것도 사실이다. 강원도 현리 후퇴작전 중, 그 포로 두 사람이, 어두운 밤을 틈타 영원히 달아나 버린 것이다. 물론 그들의 생사는 알 수 없으나, 도망친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알만했다. 나 역시 그들과 다름이 없는 것은, 병역을 기피하고 어머님과 이별 한 후, 남한으로 피난 와 남한 군에 입대했기 때문이다.
그 후, 5일 동안에 65Km을 험한 산속으로, 개천을 건너고, 수없는 사선을 지나 굶주림 속에, 하진부리 에 도착 새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 것이 5월 23일이었다. 이토록 험하고 극한 상황 속에서의 전투와 후퇴의 길은 인간의 본성을 엿볼 수 있었다. 평소 근엄한 체 하던 지휘관이나 군기를 강조하던 장교들도, 극도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니 사병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등, 각급 지휘관들도 배고픔과 죽음 앞에선 “먹어야 한다, 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본능은 똑 같았다.
그래도 전투는 계속 되었다. 그러나 결사 각오하고 전투에 임한 제 3사단 전 병력 중, 약 65%의 손실(전사자와 무기)을 보았고, 불과 34.3%인 3,621 명만이 각기 분산하여 본대로 돌아 왔을 뿐이다. 그 후, 제 23연대는 현리지구에서 후퇴하여 하진부에 도착 살아남은 자로 더불어 재편성 했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수많은 전투를 했으나 군번 없는 군인으로 적과 싸웠던 것이다. 그런데 1951년 1월, 모든 군인들에게 육군군번이 나왔다. 이날부터 우리는 실제적인 대한민국 정규군이 된 것이며, 내게 주어진 군번은 0722012, 영원토록 잊혀 지지 않는다.
군번의 위력/ 한국전쟁 발발 1주년 기념일인 1951년 6월 25일. 일등병이 된지 불과25일만에 하사로 진급하였다. 그 후, 2개월도 안된 8월15일 광복절에는 중사로 진급, 갈매기 3개의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백병전/ 제 23연대장 이관식 대령은, 미 9군단 작전명령에 의거, 우리 수색 중대로 하여금, 제 3사단 전방초소인 662 고지에 2월10일 새벽 4시까지 은밀히 이동 시켰다. 이 고지는 적군의 최전방 초소가 있는 674 고지에서 불과 5,60m 남쪽에 있다. 우리군은 담뱃불도 피우지 못하고, 대 소변까지도 철모에 받아 냈다. 또한 전투 급식은 1일1식 인데다, 일반 노무자가 지게로 짊어지고 온 주먹밥 한 덩어리였으며, 그것도 눈 깜짝 사이로 먹어 치워야 했다. 음력 정월 20일, 백설이 뒤덮인 밝은 달빛아래, 이고지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우리군은 추위와 허기짐에 지친 몸, 혼전난투의 싸움에서 승산이 없자 “각자 후퇴”란 명령을 받고 새벽 5시경 적의 포위망을 뚫어가면서 후퇴했다.
육군정량/ 당시 1인당 급식정량은 쌀, 보리 합해서 600g 이었으나, 상관이나 관계관들이 미리 책복 하는 것을 많이 봤다. 그러기에 말단 사병에게는 한 컵 정도의 작은 식량이 지급되었으며, 반합으로 각자 밥을 짓고 김치 몇 조각 찢어서 먹곤 했다. 겨울이 지나고 1952년 이른 봄, 이북출신 수색대원 3명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이북 쪽으로 도망간 일도 있었다. 다음 어느 날, 내가있는 참호 속에 6,7명의 전우가 모여 들었다. 그 들은 “지난 18개월 동안 이렇게 배가 고파서 살 수 있는 가” 하며 배고픈 타령과 불만을 하소연 하자, 그중 연대장 운전병이 연대의 보급 중대의 트럭 한 대에 우리를 싣고 전라도 지리산에 들어가 그곳 빨지산 과 합류하면 죽을 때 죽는 한이 있더라고 이곳 보다는 더 자유스럽고 밥도 잘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암시 비슷한 말을 하였다. 나는 이 말이 그의 진정한 의도인지, 배고픈데서 오는 일시적 푸념인지를 알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나는 인생 처음으로 “마라리아”발작으로 연대 의무실에서 “살바르신”한대 맞고 하루 밤 지냈다. 그 바람에 지리산 탈출계획도 알 수 없었지만, 아무도 탈출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포성은 멈추고/ 휴전협상은 무려 만 2년 반 이상을 끌어왔다. 그동안 큰 걸림돌이었던 부상포로의 상호 교환문제로, 1952년10월 이후 중단 되었던 협상은 약 4개월 후인 1953년 3월 28일에 북한이 받아 드림으로써 휴전 협상이 다시 급진전하기 시작 했다. 협상은 4월 26일부터 본격적인 회담으로 들어가 남북 쌍방 간에 포로교환 문제, 155 마일의 완충지대(비무장지대/DMZ 혹은 군사분계선, 남북으로 4Km, 동서로 250Km) 설치문제 등을 중심으로 한 휴전협상에 합의를 보았다, 이렇게 하여 합의된 문서에 유엔군 사령관 크라크 대장과 북한 대표 남일 사이에 역사적인 조인이 이루어 졌다. 이로 인하여, 만3년 1개월이 지난 1953년7월 27일, 0 시를 기하여 모든 전선에는 일제히 포성이 멈추었다.
구사일생/ 전쟁은 끝나고 나는 다행히 살아남게 되었다. 휴전은 나에게 있어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값진 추억과 인생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어간 사람과 그 가족에게는 얼마나 비극적이고 지을 수없는 상처로만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인가! 생각하니 마음이 저린 다. 또한 3년 이상 전선에서 나와 함께 싸우다가 죽어간 전우들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고, 자식과 형제의 죽음 앞에 몸부림치며 목 놓아 통곡하는 부모 형제들의 모습이 아직도 나의눈물 속에 떠오른다. 나로 더불어, 우리고향근처에 살던 참전 용사들은 156명 이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수색중대에서 싸웠고, 전사자와 실종자 그리고 북으로 다시 달아나 버린 자가 130명 나머지 26명만아 살아남았다. 그중에 한사람, 나도 끼어있다. 나의 바램 은 무너지고, 살아생전 38선이나 휴전선이 아닌 통일의 그날이 오길 바란다.
사진 설명
1965년 신부 정영자와 미조리주서 결혼
1983년 고향 떠난지 33년만에 고향방문
2009년 알라스카 크루즈 여행중 전 가족 기념촬영
1998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김희봉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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