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인천의 한국이민사 박물관이 2010년 10월에 발간한 전시유물 도록에 실렸다.
한국이민사 박물관의 배려로, 1월 13일 한인 이민 108주년 미주한인의 날 (Korean American Day 코리언 아메리칸 데이)을 맞아 특별 기획으로, 약간 수정한 글을 매주 수요일 6회에 나누어 연재한다.
<편집자주>
1) 대한제국 국민이 집단으로 미국 영토 하와이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고종황제의 윤허로 대한제국 발행의 집조(執照=여권)를 지참하고 이민 오면서부터이다.
하와이에 한인들이 오게 된 것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협회, 주한 미국 공사 앨렌과 그리고 동서개발공사 사장 데슐러 등이 노력한 결과이다. 이민이 성사될 수 있었던 전제 조건은 1882년 5월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조선과 미국과의 교류가 시작될 수 있었으며 또한 한인들이 미국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민 첫 배인 갤릭호로 102명의 한인이 1903년 1월 13일에 호놀룰루 항에 내리게 되었다. 이 들 중에는 인천 내리교회 (용동교회 혹은 제물포 웨슬레안 교회로도 알려짐) 교인들을 위시하여 경기 서부지방의 교회 교인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데슐러 사장이 이민자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내리교회 목사이며 인천과 강화를 포함한 서부지방을 관할한 존스(한국 이름 조원시)감리사가 교인들에게 하와이 이민을 권장했기 때문이다.
존스는 하와이는 기후가 좋고, 자녀교육의 기회가 좋고, 급료가 높고, 집과 의료비를 준다면서 하와이 이민을 권장하였다. 존스의 설득으로 그가 맡은 서부지방의 여러 교회 교인 28 가족이 이민대열에 올랐다.
이들을 실은 일본선 겐카이마루(玄海丸)가 제물포항을 떠나는 1902년 12월 22일에 존스 목사는 항구에 차일을 치고 환송예배를 드렸다. 아마도 동양의 여러 나라의 이민자들 중 항구에서 환송예배를 드리고 떠난 집단으로는 이것이 처음이며 마지막 일 것이다.
모든 것이 낯선 외국에 가는 교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안심시키기 위하여 축도한 것이다. 존스는 이들에게 책자도 주고 또 이민단 지도자에게는 하와이 감리사에게 쓴 소개장을 주었다.
목포와 부산을 거쳐 이틀 후 일본의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1월 2일 미국선 갤릭호를 타고 호놀룰루로 오는 10일 동안 내리교회 교인 안정수와 김이제가 매일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설교와 전도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호놀룰루에 내릴 때에는 8명의 새로운 신자가 생겼다.
호놀룰루 항에는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의 감리사 피어슨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아후 섬 북쪽에 있는 와이알루아 농장의 모쿨레이아 캠프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3월 3일에 도착한 두 번째 배에는 64명의 한인이 왔는데, 이 배에는 동서개발회사에 다니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한 현순이 통역관으로 왔다. 이 그룹은 오아후 북쪽에 있는 카후쿠농장으로 갔다.
한인들이 계속하여 도착하였고, 피어슨 감리사는 한인이 배치된 여러 농장을 방문하며 야간학교를 세워 일주일에 몇 번씩 영어 반을 열도록 도와주었다.
그 후 1905년 8월 8일까지 2년 반 동안 약 7,400명의 한인이 하와이에 도착하여 30여개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같은 민족 노동자들이 모여 살도록 숙소를 배정하였음으로, 각국의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마을, 즉 일본인 마을, 한인 마을, 폴투갈인 마을 등에 살았다.
그 후 5년 동안에 이 노동자들 중 약 2,000명은 미주 본토로 이사하였고, 약 1,000명은 귀국하였다.
그래서 1910년 미국의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을 때, 하와이에 4,533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던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이 중에는 하와이에서 출생한 미국 시민 어린 아이 36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민자들이 가지고 온 여권에 세 가지 형태가 있다. 광무 7년 (1903년) 3월에 김순건에게 발급된 집조는 순 한문(漢文)으로 쓰여 졌는데 태극과 왕실의 상징인 오얏꽃(배꽃)과 무궁화 문양이 들어 있다 (사진 #1).
1903년 4월에 고덕화에게 발급된 집조에는 태극이나 꽃 문양은 들어 있지 않으나, 국한문 혼용으로 오른 쪽에 영어와 불어 번역문이 포함되었다 (사진 위).
세 번째 형태는 광무 9년 (1905년) 4월에 이선일에게 발급된 가족 여권으로 대한제국의 국기인 태극기 한 쌍과 함께 배꽃 문양이 있고, 영어와 불어 번역문이 왼쪽에 있다 (사진 아래).
이 세 번째 형태 여권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은 “正價 金葉 10兩 정가 금엽 10량”이라는 문구가 오른쪽에 적혀 있어, 여권 발급비를 지불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 정부는 하와이로 이민을 보내기 위한 임시 기구로 유민원(綬民院)을 설치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에게 여권을 발급한 것인데, 짧은 기간 내에 여러 형태의 여권이 발급되었다.
이민자들은 조국이 그리울 때 여권에서 대한제국 왕실의 배꽃문양과 태극문양 그리고 태극기를 보며 향수를 달랬을 것이다.
태극기는 1883년에 대한제국의 국기로 공식 반포되어 집집마다 한 본 씩 비치하도록 되었다. 그리고 고종황제의 탄신일 만수성절(萬壽聖節)에 상가(商家)에 태극기를 계양하도록 되었다. 아마도 이민자들이 이민 짐 꾸러미 속에 태극기를 가져 오지 못했더라도 여권에 들어 있는 태극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찡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와이 한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더구나 을사늑약(乙巳勒約)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돌아 갈 조국을 잃어버린 한인들은 태극기만이 아니라, 국가, 무궁화가 등 조국을 대표 또는 상징하는 모든 것을 애용하면서 대한제국의 국민이었음을 기억하였다.
남아있는 사진과 유물을 통하여 초기 이민자들이 하와이에서 어떠한 대한제국 상징물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어떻게 조국을 기억하면서 나라 사랑을 지켰는지 돌아본다.
<사진설명: 광무 7년 (1903년) 3월에 김순건에게 발급된 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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