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최선영 기자 = 지난 17일 사망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생전에 성혜림·김영숙·고영희·김옥 등 4명의 여인과 동거하며 6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동거녀인 성혜림은 김 위원장보다 다섯살 연상으로 1960∼70년대 초 북한 영화계를 주름잡은 최고의 여배우로 꼽힌다.
1937년 경남 창원 출생인 성혜림은 6·25전쟁 때 좌익계열 지식인인 부모를 따라 월북한 뒤 카프 작가 리기영의 장남 리평과 결혼해 딸을 낳았으나 1960년대 말 문예부문을 지도하던 김 위원장의 눈에 들어 전 남편과 이혼하고 미혼이자 연하인 김 위원장과 동거했다.
이혼녀 신분으로 1971년 김 위원장과 사이에서 장남 정남을 낳았으나 평생 숨겨진 여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김 위원장이 여러 여인과 동거를 하면서 성혜림은 신경쇠약과 우울증, 신경성 질환, 당뇨병 등 여러 지병으로 1980년대 초부터 러시아의 크렘린 정부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다가 200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등졌다.
김 위원장은 성혜림의 사망 소식에도 끝까지 그를 외면했지만 장남 정남 부부가 모친을 임종하며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그나마 위로했다는 후문이다.
김 위원장의 두번째 동거녀는 김영숙(1947년생)이다. 그는 김 위원장의 네 여인 중 유일하게 김일성 주석의 정식 허락을 받아 결혼식을 거친 공식 부인이다.
함경북도 인민보안국 타자수를 거쳐 노동당 간부부에서 문서원으로 일하다가 간부부 사무실을 들락거리던 김 위원장의 눈에 들어 결혼했다고 한다.
김영숙은 다른 동거녀들과 달리 뛰어난 예술적 재능이 없고 착하기만 한 순종적인 시골여인으로, 김 위원장의 바람기를 견제하거나 속앓이를 드러내지 않고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봉건시대의 전형적인 내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김 위원장과 슬하에 설송, 춘송 두 딸만 둬 공식 부인으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고 김 위원장의 관심에서도 완전히 멀어졌다.
그의 딸 설송은 결혼했고 춘송은 미혼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별다른 직업 없이 김 위원장의 딸로서의 대우만 받고 있을 뿐 생모와 마찬가지로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김 위원장이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재일교포 출신의 고영희로, 김 위원장의 후계자 김정은의 생모다.
제주도 출신 고경태의 딸인 고영희는 1960년대 재일교포의 대규모 북송 때 부모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간 뒤 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 활동하던 1970년대 중반 김 위원장과 동거에 들어가 2004년 유선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줄곧 김 위원장과 함께 살았다.
김 위원장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는 수기 ‘김정일의 요리인’에서 "고영희를 알고 난 뒤부터 김정일의 여성 편력이 줄었다"고 말할 정도로 고영희에 대한 김 위원장의 애정은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영희는 두 아들 정은과 정철, 딸 여정을 낳았고, 김 위원장의 공식 부인으로, 북한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자리를 굳혔었다.
그러나 `김정일의 여인’으로서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한 그의 삶도 오래가지 못했다.
대북소식통들에 따르면 고영희는 1998년께 유선암을 진단받아 한쪽 유방을 떼어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으나 유방 절단이 김 위원장의 여인 자리를 위태롭게 만들 것으로 판단, 의료진의 만류에도 절단 대신 항암치료를 선택했다. 이것이 결국 5년여 뒤 재발을 불러와 파리의 한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사망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고영희는 아들 중 한 명을 김 위원장의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장남 정남과 그 세력을 견제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고영희가 정남의 후계자 선정을 견제하기 위해 위조여권으로 일본을 방문한다는 정보를 흘리도록 했다는 얘기도 내놓고 있다.
비록 생전에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2009년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됨으로써 망자의 소원은 뒤늦게 이뤄진 셈이 됐다.
고영희의 사망을 눈앞에 둔 시점에 김 위원장의 안방을 차지한 또다른 여인은 김옥이다.
김 위원장의 생전에 사실상 퍼스트레이디로, 김 위원장이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곁을 지킨 최후의 여인이기도 하다.
평양음악무용대학(현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김옥은 1980년대 초부터 고영희가 사망할 때까지 김 위원장의 서기실 과장 직함을 갖고 김 위원장의 업무를 특별보좌해온 덕에 일찍부터 정치와 권력의 생리에 눈뜬 것으로 알려졌다.
김옥의 아버지는 이미 1990년대부터 김 위원장의 직접 임명으로 당 재정경리부 부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옥은 김 위원장의 6차례 중국 방문과 3차례의 러시아 방문에 동행했고, 2005년과 2009년 김 위원장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났을 때 모두 배석하는 등 김 위원장의 여인 중 유일하게 외교활동에 직접 동석한 여인이다.
그는 2000년 10월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김 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의 특명을 받아 국방위 과장 자격으로 동행, 대표단의 공식 보고 외에 별도로 방미결과를 김 위원장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고영희 사망 이후 사실상 북한의 퍼스트레이디가 된 그는 권력기관의 주요 인사를 김 위원장에게 직접 건의해 관철하고, 2006년부터 김 위원장의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하자 김 위원장을 대신해 각종 서류에 결재를 하는 등 국정 전반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김 위원장이 2008년 8월 중순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김옥의 위세는 중국 마오쩌둥(毛澤東) 공산당 주석의 세번째 부인 장칭(江靑)’을 방불케 했다는 것이 대북소식통들의 전언이다.
더욱이 김 위원장은 나이가 들수록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김옥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아져 김옥의 ‘베개밑 송사’가 잘 통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김옥도 김 위원장이 갑자기 쓰러지자 국정 장악에 한계를 드러내며 병상의 남편을 회복시키는 데 급급하는 등 평범한 여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고 대북소식통들은 전했다.
(chs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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