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신사협정으로 일본인의 미국 이민이 중단되었지만, 일본 사진신부들이 더 많이 미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와이에 온 사진신부만도 약 14,300명이었다.
이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당황한 미국의 배일분자들이 좀 더 강화된 이민법 제정을 주장하게 되었고, 드디어 1924년 새로운 이민법이 통과되었다. 이 이민법으로 아시아 민족의 미국 이민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동시에 이 이민법에 의하여 미국의 비자 제도가 시작되었다. 1924년 7월 1일부터 미국의 항구에 도착하는 외국인은 어떤 형태이든 입국허가가 있어야 입국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외국인에게 비자 형태의 증서가 발급되었을까?
제도적으로 세분화된 지금의 비자가 아니더라도, 외국인이 국내를 여행할 수 있는 허가서 내지 증서를 비자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필자가 찾아낸 것으로는 1426년 (세종 8년)에 삼포(진해, 부산, 울산)에 각 60명씩의 왜인(倭人)이 거주할 수 있도록 허가를 주면서 거주허가 증서인 도서(圖書)를 발급했다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당시 대마도는 조선왕국의 관할을 받고 있었다. 물론 이 도서의 실물은 전해져 있지 않다. 그 후 450여년이 지난 1882년에 미국과 맺은 조미통상수호조약, 그리고 또 다른 여러 유럽 국가들과 맺은 조약 이후에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도착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호조(護照)라는 여행증명서 말하자면 지금의 비자 성격의 증서를 발급 받고서야 조선의 여러 곳을 (선교)여행할 수 있었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 마펫(Samuel Moffet: 마포삼열馬布三悅)은 1890년 1월에 내한하였는데 1893년 5월 11일(양력)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지금의 외교통상부)에서 발급받은 호조가 남아있다.
또한 불란서 천주교 신부 제르맹 무세(German Mousset)가 1894년에 발급받은 호조도 남아있다.
한편, 하와이 왕국은 미국의 영토가 되기 이전에 일종의 비자 제도를 실시했는데 중국 이민자들이 대상이었다. 중국인의 하와이 이민은 1852년 하와이 왕국의 카메하메하 3세 (카메하메하 대왕의 둘째 아들) 통치 기간에 시작되었다.
하와이에 대형 사탕수수 농장이 1840년부터 시작되어 180톤의 설탕을 수출할 수 있었는데, 1847년에는 설탕 수출량이 300톤으로 증가하였다.
사탕수수를 재배할 노동자가 필요했지만, 격감하는 하와이 원주민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1831년 12만 5천이든 하와이 원주민의 수가 1850년에 8만 4천으로 줄었고, 외국에서 노동자를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1850년에 제정된 법에 의하여 외국 노동자 투입이 가능해 졌고, 1852년 1월 3일에 중국인 노동자 200명이 5년 계약으로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중국으로부터의 배 삯과 5년 동안 월급 $3과 의식주가 공급되는 조건이
(사진 위 이동진 일본여권)
었다. 하와이 왕국이 1864년에는 이민국을 설립하고 외국 노동자 입국을 관장하였다.
1865년에 522명 (95명의 부인과 3명의 어린이 포함)의 중국인이 도착하였다. 이들은 숙식제공 이외에 4달러의 월급과 구정에 2달러의 보너스가 지급되는 5년 계약을 갖고 왔다.
중국인들의 하와이 이민이 시작되기 이전 이미 1848년 2월부터 중국인들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근방 금광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1852년까지 중국인 수가 2만 명이 되었고, 캘리포니아 주 총인구의 10%를 차지하였다.
1870년에는 미국의 중국인 수가 6만 3천으로 증가 되었고, 이들의 77%가 캘리포니아 주에 살고 있었다.
1870년 미국 인구조사에 의하면, 캘리포니아 주에 3,536의 중국 여인이 있었는데, 이 중 61%가 매춘부였다. 1875년 미연방의회는 저임금 중국인 노동자와 중국인 매춘부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방편으로 미국의 첫 이민법 (페이지 법 Page Act)을 통과 시켰다. 그러나 백인들의 반 중국인 경향은 계속 증가하였고, 드디어 1882년 미연방의회가 중국인 배척법을 통과시켜 중국인의 미국 입국이 전면 금지되었다.
하와이 왕국도 미국의 중국인 배척법 통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와이 왕국도 1884년부터 하와이 중국인 이민자들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하와이에 살다가 중국을 방문하는 자와 또 하와이 왕국에 입국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와이 여권을 발급하였다.
지금의 비자에 해당하는 형태의 여권이었다. 홍콩과 호놀룰루에서 1884년 3월말부터 15개월 동안 2,800개의 여권이 발급되었다. 1852년부터 1898년까지 약 4만 명의 중국인이 하와이로 이민 온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하와이로 이민 온 한인들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 그들의 법적 국적과 여권에 따른 혼란스런 기간을 격어야 했다. 에스터 박은 3살 때 부모를 따라 평양에서 왔다.
1926년에 하와이대학을 졸업하고 호놀룰루의 기독교여자청년회 (YWCA)에서 17년 동안 일 하였다.
1947년 5월에 미국 YWCA 본부가 에스터 박을 한국 YWCA의 미국 고문으로 발령했을 때 그는 미국 여권도, 한국 여권도, 일본 여권도 갖고 있지 않은 무국적자였다. 따라서 그는 미국에 재입국할 수 있는 특별 증서를 발급 받고서야 미국을 떠날 수 있었다.
일종의 입국 비자인데, 여권이 없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증서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아시아 민족이 미국 시민권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1952년 이민법 제정으로 가능했다.
2010년에 작고한 이동진 원로 목사는 1938년 7월 9일에 일본여권을 가지고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미국에 도착하였는데, 그의 여권에 1년의 학생 비자 도장이 찍혀있다.
1년 후에 2년간 유효한 학생 비자를 다시 받았고, 1943년에, 그리고 1947년 3월까지 그의 비자가 연장되었음을 여권에서 알 수 있다.
이동진이 1942년 12월에 인디아나 주 출생의 한국계 미국인 프란씨스 오와 결혼하였지만, 미국 시민과 결혼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신청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동진은 계속 학생 비자를 연장하고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동진은 1953년 6월 25일에 미국 시민권을 받았고, 에스터 박도 1955년 4월 22일에 미국 시민이 되면서 미국 여권을 가지고 한국에 다닐 수 있었다.
1951년에 하와이에는 1,502명의 한국 출생 한인 이민 1세들이 생존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이 1952년 이후에야 미국 시민이 되었는데, 그 중에는 미국 시민권을 받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김창수는 18살인 1904년에 하와이에 도착 하였다.
미국 시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1965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차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대한민국 호놀룰루 영사관에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다.
한 장의 A4 용지를 두 번 접어 4면으로 만든 것이다.
여권이 여행에 필요한 증서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남아 있는 여권을 통하여 발급하는 국가의 제도를 알 수 있고, 또 거류하는 국가에서의 소지자의 신분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다.
이렇게 한인 이민사를 여권을 통하여 알 수 있기도 하다.
<끝>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