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인종 용광로’에 빗댄 말이 이젠 진부하게 들린다. 족보가 너무 복잡해서 자기가 무슨 인종인지 헷갈린다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지난 2010년 센서스에서 정부가 지정한 4개 부류 인종(백인, 흑인, 아시아-태평양계, 본토-알래스카 원주민)의 어디에도 자기가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이 2,170만 명이었다. 어림잡아 14명 중 1명꼴이다.
본래 인종(race)은 같지만 민족(ethnicity)이 전혀 판이한 경우도 많다. 백인 중에 영국계와 독일계가 다르고, 흑인 중에도 아프리카계와 캐리비안계가 다르다. 그래서 인종을 앞세워 민족 정체성을 밝히는 소수계가 많다. 아이리시 아메리칸(아일랜드계), 쥬이시 아메리칸(유대계), 차이니스 아메리칸, 재패니스 아메리칸, 코리안 아메리칸이 그렇다.
지난 달 AP통신이 흥미로운 기사를 보도했다. 흑인들 중에 ‘아프리칸-아메리칸’보다 차라리 예전처럼 ‘블랙’으로 불러달라는 젊은이가 늘어난다는 얘기였다. 이들은 부모로부터 아프리카에 관해 들어본 적도, 가본적도 없고 아프리카 문화가 뭔지도 모른다며 “지금 아프리카로 돌아가라면 물고기보고 물 없는 어항에서 살라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한 30대 흑인 사업가는 흑인들이 피부색만 아프리카일 뿐 아프리카와의 인연은 먼 옛날얘기라며 더구나 흑인이 백악관 주인이 된 마당에 ‘노예의 후예’를 상기시키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는 자기가 피부 색깔보다 더 중요한 ‘정신색깔’의 미국인이라며 아프리카와 전쟁이 붙으면 미국을 위해 싸우겠다고 호언했다.
생뚱맞게 인종얘기를 늘어놓는 건 지금 진행되고 있는 본국 총선 재외국민 투표상황을 지켜보며 AP기사가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상(우려)대로 미주 각 공관의 투표율이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이다. LA가 그나마 조금 높았지만 전체적인 미주 지역 투표율은 형편없이 낮았다.
시애틀의 경우 678명이 투표해 투표율은 32.8%에 머물렀다. 이 같은 투표율은 한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워싱턴ㆍ오리건ㆍ아이다호ㆍ몬태나 등 서북미 4개주에서 예상했던 유권자수 7만8,353명의 0.8%에 해당한다. 예상 유권자수 100명 가운데 2.6명꼴로 선거인 등록을 했고, 등록자 100명중 0.8명꼴로 투표에 참여한 셈이다.
미주한인들의 투표율은 낮기로 정평 나 있다. 마지못해 유권자등록을 해도 투표는 까먹기 일쑤다. 심지어 선거에 한인후보가 출마해도 딴전 부린다. 본국 선관위는 재외국민 투표 목표율을 60%로 잡았다는데 꿈도 야무지다. 오리건주 유진에서 시애틀까지 5시간을 운전하고 와서 투표한 전직 한인회장 같은 예외가 없는 건 아니지만 60%는 턱도 없다.
투표장소가 1박2일 여행거리인 외지 유권자들을 위해 우편등록과 우편투표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도 ‘언 발에 오줌 누기’이다. 미 전국 유권자 223만명중 투표하겠다고 등록한 사람이 12만3,571명(5.5%)에 불과했다. 서울의 웬만한 선거구 유권자만도 못하다. 이 정도 표를 밑천삼아 비례대표 의원을 넘본 한인이 있다면 그 사람 꿈 역시 야무지다.
미주한인들의 투표율은 갈수록 줄어들게 돼있다. 이민1세가 고령화하고 신규이민도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족외혼(族外婚)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민병갑 교수(뉴욕 퀸즈대)는 미국 태생 한인 2~3세 10명 중 6명이 타인종과 결혼한 것으로 집계했다. 이들이 한국선거에 관심 갖기를 바라는 건 연목구어다. 그들 역시 ‘정신색깔의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본국정부는 이번 재외국민 선거에 293억원을 썼다. 3,000만달러 가까운 거금이지만 수확이 너무 초라하다. 차라리 그 돈을 한인 후세들을 위한 장학금이나 모국연수 프로그램에 투입해서 그들에게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긍지를 심어주는 것이 본국과 동포사회에 장기적으로 유익하다. 재외국민의 참정권 부여는 상징적 가치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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