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구호기관‘차일드펀드’스티브 스털링 부사장
‘차일드펀드(ChildFund)’의 스티브 스털링(Steve Stirling) 부사장이 미국 부모에게 입양되지 않았다면 인생이 어떻게 됐을까? 지금의 모습과는 크게 달랐을 것이라는 예상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심한 소아마비를 갖고 있던 조명수 (한국명) 소년도 미국 입양이 결정됐을 때 그것을 직감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가끔 놀림을 받기는 했지만 한국과는 비교가 안됐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제법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명문대를 나와 주요 기업들을 거친 뒤 지금은 일년 예산 2억5,000만달러를 다루는 자선단체의 최고 관리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버지니아한미장애인협회(회장 수잔 오) 주최로 지난 12일 열린 세미나 강사로 참석해 40여명의 한인들에게 ‘역경을 극복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줬다. 현재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거주하고 있는 스털링 부사장과 이메일로 나눈 인터뷰를 정리했다.
<이병한 기자>
▲ 소아마비 때문에 고아원에 맡겨졌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나?
- 한 살 때 폴리오균이 전염돼 장애인이 됐다. 부모님들은 나를 고쳐 보려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실패했고 5살 때 홀트재단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나를 보냈다. 미국에 입양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고아원 생활은 주변 아이들의 끊임없는 놀림 때문에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나는 공부를 하고 싶은 열망에 학교는 꼭 갔다. 그러다 누나와 함께 짐 스털링 씨 가정에 입양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어린이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부모였다. 모두 6명의 아이들을 입양했고 그 중 네 명은 한국에서 왔다.
▲ 미국에 온 이후의 삶은 어땠나? 무섭지는 않았을까?
-미국에 간다니까 무척 흥분됐다. 이민법 때문에 2년이라는 기간이 걸렸지만 누나와 미국에 올 수 있게 됐다. 당시 테드 스티븐스 알래스카 연방상원의원이 도움을 줬다. 미국생활은 매우 재밌었고 친구들도 대체적으로 친절했다. 어디서든 잘 받아들여졌다. 가끔 놀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 그래도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을텐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뭔가?
-청소년 시기에 난 매우 인기가 있었다. 밴드에서 트럼펫을 연주했고 고등학교 회장으로도 뽑혔다. 나중에는 앵커리지 교육구를 대표하기도 했다. 크게 아쉬웠던 것이라면 여자친구는 많았지만 ‘걸 프렌드’는 없었다는 점이랄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 기도도 응답해 주셔서 나의 반쪽인 아내(안숙희)와 30년간 살고 있다.
▲ 무엇을 하든 항상 최고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다면 무언가? 동기부여를 해준 책이나 멘토가 있었나?
-나는 꿈이 있었다.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이 되고 싶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부모님들이 나의 멘토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항상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어느 대학이 미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냐고 물었더니 아이비 리그와 스탠포드라고 알려주셔서 그중 하나에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돈이 없다고 솔직히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님이 길을 내주실 것”이라고 말했고 결국 그대로 됐다. 대학에 다닐 때 기숙사에 포스터를 늘 붙여놓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꿈을 꾸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를 의지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적혀 있었다. (스털링 부사장은 코넬대 농업경제학과와 노스웨스턴대 MBA 출신이다) 공짜 점심은 없다.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미국은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어린이도 하나님의 은혜로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다.
▲ 당신에게 가장 큰 축복이랄 수 있는 아내는 어떻게 만났나?
-앵커리지에 거주할 당시 아내의 가족과 우리 가족은 10년간 친구 사이로 지냈다. 아내의 어머니는 김치를 잘 만들었는데 크리스마스가 되면 1 갤런 병에 김치를 담아 선물했고 우리는 한 자리에서 먹어치웠다. 어느 크리스마스 휴가 때 파리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다가 아내를 시어스 몰에서 만났다. 갑자기 그녀에게 “프랑스에서는 어떻게 키스를 하는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내는 얼굴을 붉히며 모른다고 했고 난 양 볼에 키스를 해줬다. 그랬더니 함께 있던 그녀의 부모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랑에 빠지면 바보같은 짓을 하는 모양이다. 나는 노스웨스턴대 켈로그 경영대학원에 돌아와서도 일주일간 매일 전화했다. 나는 MBA를 마치면 2년간 3만달러를 모아 결혼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숙희에게 결혼 신청을 하면 성공할 확률은 50%라고 생각했다. 사실 확률은 100만분의 1이었고 그녀는 훨씬 나은 조건, 더 잘 생긴 사람의 결혼신청도 거절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나의 프로포즈에 ‘예스’라고 답했다. 내 질문을 잘못 이해한 듯 싶어 다시 물었더니 똑같은 대답을 했다. 하지만 아내는 내가 1987년 예수를 구세주로, 1994년 주님으로 모실 때까지 많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내가 이기심과 성공에 대한 욕심에 휘둘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바꿔주셨고 난 보다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됐다. 아내는 고아 출신의 장애인을 남편을 맞았다는 이유로 또다른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 자신의 신앙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주면 좋겠다.
- 1987년 아버지 날에 예수를 영접했을 때 아내는 예수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었지만 난 ‘구세주’로만 믿었다. 단지 천국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94년 ‘프라미스 키퍼스’ 집회에서 한 목사님이 교만이 가장 무서운 죄 가운데 하나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뺏어가기 때문이라고 설교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하나님은 나에게 직접 말씀하셨고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깨닫게 됐다. 입양, 명문대, 결혼, 두 아이들, 경력, 좋은 집과 자동차 등등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은 내가 한국에서 침묵으로 절규할 때 듣고 계셨고 알래스카에서 좋은 아내를 위해 기도할 때도 함께 하셨다. 예수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던 순간부터 그분은 나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고 계신다.
▲ 한인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특히 장애 등 어려움을 겪는 가정이 있다면?
-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 예레미야서 29장11절, 에베소서 2장10절, 요한복음 9장1절 등을 명심하면 좋겠다. 도전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비록 원한 것은 아니었어도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요한복음 9장1절은 나를 변화시켰다. 나는 이제 폴리오를 갖게 하셔서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 상처입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하다고 기도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은혜가 충만한 분이다. 그분은 당신과 관계를 맺어 축복하기를 원하신다. 모두 주님을 믿고 신뢰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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