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풍 이경자 부부
▶ "매일 아침 받아보는 삶의 위로"
창간 43주년을 맞은 한국일보는 독자와 함께 성장해왔다. 본보를 처음 구독했던 독자들은 이제 세상의 지혜를 후세에게 건네줄 만틈 순리와 이치를 깨닫는 연륜이 되었다. 지난 71년부터 본보를 구독해온 42년 독자 이석풍(73), 이경자(69) 내외와 함께 본보 변화상과 언론의 역할을 되새겨보았다. 이 자리에는 30여년 본보에서 근무해온 임인순 독자부장이 함께 했다. <편집자주>
"이민초기부터 생활의 길잡이
한인사회 리더로 더 힘써주길"
◆고단함 달래준 오랜 친구
임인순: 40여년 한 신문을 고집해온 독자들 덕분에 본보가 확고한 자리를 유지해올 수 있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이석풍: 61년 미국에 와서 눈코뜰새 없이 살았다. 일하다가 짬이 나면 한국일보를 봤다. 그리운 한국소식이 맘을 달래줬다. 그러다보니 신문보는 것이 생활화됐고 일상이 됐고 안보면 허전하고 섭섭해졌다. 오래된 친구처럼 돼버렸다.
이경자: 67년 미국에 왔다. 그 당시엔 한국일보 밖에 없었다. 한국일보가 전부였다. 한국일보를 통하지 않으면 한국소식과 한인사회를 알기 어려웠다. 광고도 꼭 한국일보에 내야 효과가 있었다. 70대후반, 80년대 초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이곳에 뿌리내리려 했지만 사라져 버렸다. 그만큼 한국일보가 저력이 있었으며 후발주자에게 추월당하지 않는 힘이 있었던 것 같다.
◆온라인 시대 커뮤니티 신문의 역할
임인: 과거와 달리 한국소식은 물론 전 세계의 뉴스를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커뮤니티 종이신문으로서의 한국일보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석: 과거 한국일보가 아니면 한국의 소식을 접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모든 언론을 다 검색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일보는 43년간 미주한인들을 위한 신문을 만들면서 커뮤니티 행사를 주최하거나 적극 후원하고 동네 소식을 전달해 왔다. 또 방대한 지사망을 통해 미 전역의 한인 소식이나 주류사회 소식을 한인의 입장에서 보도해왔다. 이외에도 다양한 칼럼, 독자들의 기고 등 함께 숨쉬는 신문으로 성장해왔다. 온라인 시대에 맞춰 새로운 뉴스전달 방식을 도입하는 일도 해야 하겠지만 위에서 말한 지난 43년간의 한국일보 활동이 한국일보를 보게 만드는 자산인 것 같다. 또 종이신문이 주는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기록 남아있는 소중한 자산
임인: 한국일보는 이민생활의 벗으로 무엇보다 로컬 커뮤니티 소식과 다양한 한인 인사들의 동정을 자세히 알려주고 사회의 각종 부조리를 짚어내고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한국일보를 보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이경: 94년부터 2009년까지 SF매스터코랄 소프라노로 활동했던 시절 내가 신문에 난 기사를 스크랩해 두었다. 신문에 실린 내 모습을 보는 것은 굉장히 설레고 흥분되는 일이었다. 몇년 전부터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사회적 활동이 줄었지만, 다시 몸이 회복되면 매스터코랄을 위해서 뒤에서 도와주고 싶다. 지금도 단원들과 연락하고 지낸다.
이석: 세븐 일레븐 경영시 직원모집 광고를 한국일보에 내곤 했다. 그 광고를 보고 찾아온 한인들이 많았다. 한인들의 이민이 폭발했던 70년대 샌로렌조 지역에 한인 그로서리라고는 우리 집밖에 없었던 터라 초기 이민자들이 발판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또 한아름골프회를 한국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임승쾌씨와 창립해 15년간 회장으로 지내면서 골프대회 광고를 한국일보에 실었다. 또 대회서 좋은 성적을 내면 기사화되기도 했다. 우리 부부의 전성기 시절이 한국일보에 다 기록으로 남은 셈이다.
◆매일 새소식 접하는 즐거운 일과
임인: 지금은 SF크로니컬이 한국일보 배달을 책임지고 있다. 스탁톤, 트레이시, 아번 등 SF크로니컬이 배달되는 지역은 한국일보도 다 전해지게 되면서 지역망이 넓어졌고 서비스도 한결 좋아졌다.
이경: 새벽 5시쯤 신문배달 차가 덜컹덜컹 거리며 오는 소리를 잠결에 듣는다. 그 소릴 들으면 ‘오늘도 신문이 왔구나’ 안도가 된다. 별일없이 하루가 이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국일보를 보지 않으면 세상 일과도 담을 쌓게 된다. 이제는 시간이 많으니 더 신문과 가까워지는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게 된다. TV는 그냥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지만 신문은 그렇게 못한다. 정신적인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지만 즐거운 일과이다.
◆동포들의 신뢰 받는 신문
임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좋은 신문’ ‘동포사회를 선도하는 신문’ ‘올바르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신문’을 만들기 위해 전직원이 노력해왔다. 한국일보에 바라시는 점이 있다면?
이석: 나는 스포츠면을 즐겨본다. 미 스포츠계 소식이 더 폭넓게 소개되길 원한다. 또 커뮤니티와 주류사회를 잇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길 희망한다.
이경: 신문사는 동포들이 의지하는 곳이다. 약자들이 기대는 곳이다. 어둔 곳을 밝혀주고 용기와 위로를 주는 신문이 되길 바란다. 오랜 시간 한국일보를 믿어온 동포들의 신뢰가 더 깊어지길 바란다.
<정리=신영주 기자>
9남매중 맏이인 이석풍씨는 1961년 유학을 와 영주권을 취득한 후 동생들을 모두 초청했다. 현재 이석풍씨의 직계가족은 54명에 달하며 본인과 동생들의 배우자 가족중 이곳에 사는 사람까지 모두 합하면 약 300여명에 달한다. 혈혈단신 미국에 온 후 50년만에 300여명의 대가족을 이룬 것이다. 이석풍씨의 동생들 중 첫째 여동생 이순애씨와 둘째 남동생 이석범씨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순애씨의 남편 박희종씨는 버클리 중앙장로교회에서 시무하다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했으며 4째 여동생의 남편은 우리교회(구 만민교회) 담임인 최병구 목사다. 막내 남동생 이석찬 씨는 샌프란시스코 지역 한인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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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임인순 독자부장(왼쪽)이 42년 독자 이석풍(오른쪽) 이경자 내외와 한국일보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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