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양 전 주 대법원장, 해리 김 빅 아일랜드 전 시장, 리 도나휴 호놀룰루 전 경찰국장, 팻 하마모토 전 주교육감등 사탕수수농장 한인 2세들이 곳곳에서 활약하며 2003년 미주한인이민 100주년 하와이 한인사회의 자긍심을 높였다. 10년이 지난 오늘 미주한인 이민종가 하와이는 도나 모카도 김 주상원의장, 리처드 림 주 경제관광개발국장 등 한인계 3세들의 활약을 지켜보며 미주한인이민 110주년의 의의를 기리고 있다.
이민종가 하와이에서 이민 후손들의 활약은 주류사회 정계는 물론 방송, 호텔 및 교육 문화계 등 각계에서 그 역량을 발하며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여주고 있다.
16일 주상원의장으로 취임하는 도나 모카도 김 주상원의원은 특별히 1월13일 미주한인의 날에 즈음한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하와이 한인들은 숫자적으로는 타 인종에 비해 열세이지만 이러한 수치적 통계자료는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지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잣대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 근면과 희생, 자랑스러운 문화와 가치관 등은 하와이 한인사회만이 가진 특색이다”고 한인으로서의 강한 자부심을 표했다. 아울러 “ 미주 한인이민 110주년을 축하하며 앞으로 국가와 지역발전을 목표로 한인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하자”고 당부했다.
또한 주하원 재정위원장에 선출되어 올해 바쁜 의정활동을 하게 된 실비아 장 룩주 하원의원도 지역구 8선의원으로 정치 연륜을 더하며 하와이 민주당은 물론 주내 정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외에도 샤론 하 주하원의원도 활동하고 있다.
로컬사회 여론을 주도하는 ABC, NBC 계열사 TV방송국에도 케니 최(KITV), 타냐 요아킨, 리사 쿠보타(KGMB) 등 차세대 한인 방송인들이 포진하고 주류사회 한류 확산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닐 애버크롬비 주지사는 자신의 재선 가능여부를 결정할 주경제관광개발국장직에 리처드 림 한인 3세를 발탁, 강력한 약발을 보이고 있다. 관광업을 비롯 에너지와 녹색산업 부문에서 한-하와이의 활발한 교류가 이어지며 하와이 경제활성화 동력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주내 특급호텔 업계에서의 한인들의 활동도 주목 받고 있다.
특히 하와이 최고급 호텔로 유명한 할레쿨라니와 하얏트 와이키키 리젠시의 경우한국시장은 물론 일본과 아시아지역 판촉이사직에 한인을 발탁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같은 이민후손들의 각계에서의 괄목할만한 활동의 뿌리는 바로 사탕수수농장 이민선조들의 땀과 노력이 있어 가능했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은 한인사회의 성장을 주도함은 물론 고국의 경제한류 도약의 발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와이 한인사회는 13일 미주한인의 날을 기념하는 만찬의 주제로 이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것으로 정했다 하와이 미주한인재단이 주최하는 이날 만찬에서 자랑스러운 한인으로 공로패는 받는 이민 선배들은 다음과 같다.
<에스더 권 아리나가>
은퇴한 변호사로 커뮤니티 봉사 및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선친 권도인은 1905년 당시 초기 이민자들의 대열에 합류해 하와이로 이주했고 모친 이희경 여사는 사진신부로 선친과 혼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리나가 여사의 부모는 하와이 현지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2004년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바 있다. 최초의 하와이 주 여성인권감독원과 인문위원회의 위원으로, 그리고 사법역사센터와 하와이 변호사 재단, 미 자유인권협회의 회원으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2003년 당시 미주 한인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에도 참여했고 현재 하와이 원주민 역사학회의 이사로 재직 중이다.
Allan Saunders: The Man and His Legacy의 공동저자를 맡은바 있고 하와이 이민 여성들의 역사를 다룬 Montage: An Ethnic History of Women in Hawaii, 미주 한인이민 100년사를 다룬 Century of the Tiger: One Hundred Years of Korean Culture in America 1903-2003을 집필하기도 했다.
<마가렛 정>
한인 2세로 인생의 황혼을 맞아 나의 부모님과 내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준 미국 이란 나라에 대해 되돌아 보고자 한다.
오늘 우리는 자랑스러운 미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각자의 재능을 다른 이들을 위해 활용하며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지난 삶을 되돌아 보면 연방정부와 주 정부 사법부, 그리고 금융업과 개인사업에 매진해 왔으나 지난 수년 간은 한국어회화 교실에 다니며 나의 뿌리를 다시 찾고 조상들의 문화적 성취를 재발견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새해에도 여러분과 가족들에게 축복이 있길 기원한다.
Kam Sa Ham Ne Da!(감사합니다!)
<정남용>
정남용씨는 1916년 선친 정두옥과 사진신부 이봉아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와이알루아 출신의 한인 2세이다.
선친 정두옥씨는 와이알루아 농장에 위치한 김창원 회장의 선친 김유호씨가 관리하던 소매점의 점원으로 일하다 훗날 카렌 안 판사의 선친 안원규씨의 밑에서 양복수선 기술을 배워 양복점을 오픈 하게 된다.
정씨는 렐레후아 고교를 졸업한 후 1938년 하와이주립대 농과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카우아이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1941년부터 1948년까지 미군에 지원했다. 군 복무기간 동안 농무부에서 근무했고 이후 미 군정체제하에서 한국농업협회로 발령받아 근무한바 있다.
제대 후에는 아이오와 주립대 수의학과에 입학해 1953년 졸업한 이후 카이무키에서 4명의 자녀를 키우며 동물병원을 운영했다.
<김홍우(미국명 듀이)>
현재 하와이주립대 명예 총학장, 그리고 주내 7개 커뮤니티 칼리지의 최고운영자로 재직 중이다. 수 십년간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설립을 위한 모금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직접 자산을 털어 거액의 기부금을 희사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하와이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교수를 초빙하기 위한 비용을 직접 대기도 했고 1994년에는 UH동문회로부터 영예의 전당에 헌정되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워싱턴 소재의 아시아 태평양 정책연구소의 소장직을 역임했고 한국정부의 요청으로 상수도 설계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수년간 현 First Federal Savings의 전신인 Island Federal의 디렉터, 그리고 퍼시픽 푸드 서비스의 회장직을 역임했다.
<김성근(미국명 조)>
노스 코할라 지역에서 김흥순과 박영진과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독자로 태어나 1살 때인 1924년 와히아와로 이주해 왔다.
제대 후에는 농사를 시작했으나 7년간의 흉작 끝에 포기하고 텔레비전 사업에 뛰어들었다. 1980년 은퇴할 때까지 방송기술자로 근무했다.
1974년부터 동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부회장과 회장직을 역임하고 이승만 장학재단의 위원으로 17년간 활동했다. 1989년부터 2002년까지는 1936년 당시 한인 후손들의 체육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태극회의 회장직을 역임했고 이 곳에서 활동하던 청소년들이 가정을 갖게 되자 그 부인들과 가족이 함께 가입하면서 사교클럽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태극회는 이외에도 한인 고아들을 돕는데도 나서 지금은 정신 및 지체장애인들을 위한 시설 애광원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버트 고>
고씨의 모친 박말순 여사가 17세 나이에 사진신부로 선친 고지운에게 시집온 것은 1923년으로 하와이에 이민 와서 전혀 영어를 할 줄 몰랐음에도 4명의 아이들을 혼자서 키워낸 여장부로 알려져 있다.
박 여사는 천부적인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생전에 하숙집과 2개의 야채상점, 2곳의 카네이션 농장, 그리고 한국식품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1972년 박여사가 은퇴한 후에는 로버트 고씨와 형제들이 가업을 이어 모친 박씨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성장시켰고 훗날 마이크 아이리시에게 사업체를 매각하기에 이른다.
고씨는 1949년 맥킨리 고등학교를 졸업해 카피올라니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비즈니스와 마케팅 부문에서 2년제 학위를 이수했다. 시 공무원으로 일하다 보험인으로 전향했고 주 방위군에 입대해 사병 중에서는 최 고위직인 부대 주임상사로까지 승진했다.
이후 김창원 회장의 R.M. Towill에 입사해 근무했고 각종 한인 관련 행사와 단체에서도 봉사했다. 1995년 은퇴 후에는 49년간 함께해 온 부인 준 요시다와 함께 독거노인들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는 Meals on Wheels에서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현재 미 암협회에서 환자들을 실어 나르는 운전기사로도 봉사하고 있다.
<헨리 & 로즈 리>
헨리 ‘능주’ 리 옹은 평양출신으로 1930년에 하와이로 이주해 온 이길택씨와 사진신부인 이야모씨와의 사이에서 1930년에 태어났다.
선친 이길택씨는 1918년 3월6일 미군에 입대해 하와이 최초의 보병부대에 편성됐으나 동원해제 명령으로 1919년 7월10일 명예제대 했다.
헨리씨도 미 군에 입대해 24년간 복무했고 한인으론 처음으로 미군에서 선임하사로 승진한 인물로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와이 주 정부 전문직 라이선스 발급소의 최고 행정관으로 1989년 은퇴할 때까지 근무했다. 1983년에는 35년간 몸담았던 와히아와 라이온스 클럽의 회장으로 선출됐고 1984년에는 하와이 한인상공회의소장직에, 그리고 와히아와 주민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로즈 리 여사는 1932년 9월15일 라나이 섬에서 박춘식과 윤성미(미국명 클라라)씨와의 사이에서 출생했다.
선친 박씨는 돌 파인애플 농장의 감독관으로 일했고 모친은 가정에서 살림을 살았다. 모친 윤씨는 2살 때 하와이로 이민 온 후 라나이 섬에서 재봉사로 일하다 호놀룰루에서는 맥키너리 백화점에서 근무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스코필드 병영에서 일했다.
로즈 리 여사의 모친 윤씨는 1966년 포트 셰프터 내에 자신만의 양복점을 갖게 된다. 로즈 리 여사는 렐레후아 고교를 졸업한 후 캐논 비즈니스 스쿨을 나와 모친의 가게 일을 거들었고 1986년에 가게를 넘겨받게 된다.
로즈 리 여사는 와히아와의 ‘한인타운’에서 한인후손으로써는 마지막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가업을 최근까지 이어온 유일한 인물이다.
<프랜시스 C. 박>
1921년 와히아와에서 태어났다. 선친 박호병씨와 프랜시스는 1927년 한국으로 돌아와 1938년까지 김해와 서울에서 생활하다 하와이로 돌아왔고 1940년부터 진주만의 미 해군 조선소에서 전기공 보조로 6년간 근무했다. 1946년부터 3년간 광주의 주한미군부대에서 통역사로 근무한 후 하와이로 돌아와 1992년 은퇴하기까지 와히아와 한인교회에서 운영하는 한글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1942년에는 한인 청년체육협회를 설립했고 1949년에는 KHON의 한국어 라디오 프로그램 담당으로 일하기도 했다.
1966년-67년까지 국민회장직을 역임했고 뛰어난 음악가로도 알려져 있다.
<사진설명: 도나 모카도 김 주 상원의장, 리처드 림 주상경관광개발국장, 실비아 장 룩 주 하원 재정위원장, 케니 최 ABC계열 KITV 앵커, 하얏트 와이키키 아시아 담당 오세방 세일즈 이사, 할레쿨라니 호텔 아시아 담당 방지훈 세일즈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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