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주립대(UH) 한국학연구소(소장 김영희)가 미주한인 이민 110주년을 기념, 미 본토와 하와이 현지 주류사회에서 활동하는 각계 전문가들을 초청해 청소년들을 위한 조언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하와이에서 성장기를 보내는 법: 한국계 미국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찾아’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토론회의 패널리스트로는 UC버클리 사회학과의 존 리 교수, 샤론 하 하와이주 하원의원, 한 & 헤센 법률법인의 김윤지 변호사, 소설 ‘타투’ 등으로 널리 알려진 크리스 맥킨니 작가가 참석했다.
<존 리 교수, UC 버클리 사회학과>
과거를 모르는 이들은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미주한인 이민 110주년을 기념한 이번 토론회에 참석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내가 자라난 60-70년대만 해도 한국에 대해 아는 현지인들은 거의 없었다.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미국이나 하와이 주민들의 이해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시리즈 M.A.S.H. - 그것도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였고 - 또 다른 고정관념은 바로 ‘코리안 바’로 통칭되는 한인 여성들이 운영하는 술집들에 대한 하와이 현지인들의 편견이었다. 심지어 이들 술집 여주인들을 일본식으로 ‘마마 상’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한국에 대해 좀 안다는 이들도 독재정권이나 김대중 납치사건 등의 소식을 접하면서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고 공산정권인 북한에 대한 인식도 물론 지금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았던 기억이다.
이민 온 부모들은 성공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반면 실제로 미국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실정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미국 드라마를 본 어머니가 ‘여기에서는 남자들이 설겆이를 하는 구나’라고 생각해 누나들 대신 나에게 집안일을 거들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독실한 기독교신자들로 교육을 중시한 선조들은 자식들이 의사나 변호사로 성공하길 바랬고 나의 부모님들도 마찬가지로 내가 의사가 되길 원했었다.
푸나후 고교를 다닐 당시 학교에 나를 데리러 온 아버지가 흑인친구와 함께 농구를 하던 모습을 보고 무척 화를 내신 기억이 있는데 그 흑인친구가 - 나보다 학교성적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대학생일 때에는 신생 소프트웨어 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에 투자를 권하던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고 학업에만 매진해 결국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친구는 6년 만에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랐다. 내가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웃음).
한인 이민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창의력과 근면정신을 실천해 주류사회에 합류하기 위한 노력에서는 유대인들과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항상 강조하듯이 한인 이민자로써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 일류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생에 있어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윤지 변호사, 뉴욕에서 활동>
1991년에 미국으로 이민 와 호쿨라니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한 여자아이가 ‘너도 한국사람이니 우리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쪽지를 받아 들고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크리스탈이란 이름의 그 친구와는 부모님들끼리도 친해져 왕래가 있었는데 우리가 가끔 수업 중에 장난을 치더라도 선생님들은 한국인 학생들은 우등생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어 딱히 나무라시진 않았던 것 같다.
솔직히 다양한 인종이 함께 어우러진 이곳에서 동양인으로 자란다는 것 자체가 매우 평범한 일이어서 다른 학생들과도 거리낌 없지 지냈지만 본토의 대학에 가니 그곳에서는 온통 백인들 뿐이어서 그쪽의 학생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하와이에서 자라는 여러분들은 한인으로써 무엇을 해도 다 통한다.
심지어 김치를 즐겨먹는 현지인들도 있으니 말이다.
학업을 마치고 사회인이 되어서는 여러 한인단체들의 지원과 활동으로 주류사회에서도 젊은 한인 전문직 종사자들이 두각을 나타냈는데 타 인종사회에서는 단지 한인이란 이유만으로 여러 가지 특혜를 입는 것에 대해 질시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한인으로 성공하기까지는 가족들의 헌신과 도움이 컸다. 그리고 근래에 들어서는 한국인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는가 하면 김윤아 선수, 가장 최근에는 가수 싸이의 국위선양도 한인 이민자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데 한몫을 하고 있어 지금의 이민사회 내 환경은 예전보다 크게 나아졌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이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과도 같이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지만 여러 인턴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경험도 해 보고 자신이 진정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찾아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샤론 하, 하와이 주 하원의원>
일리노이 주 스프링 필드에서 태어난 한인 2세이다.
LA에서 살다 하와이로 이주해 왔고 여느 한인 부모님들이 원하는 자식들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도 배우고 매일 공부만 했는데 솔직히 한국인, 특히 모범생이란 이미지가 동료 학생들에게 비춰지는 것이 싫어 머리도 노랗게 물들이고 치어리더 활동도 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한국의 연세대에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세계 각국에서 온 한인들과 교류하면서 ‘한국인, 그리고 모범생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라고 느끼게 됐다.
특히 나이가 들자 진정한 미국인은 인디언들뿐이지 지금 미국을 이끄는 주류사회의 인물들 중 진정한 미국인은 없고 모두가 이민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본토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하와이로 돌아오고 싶다고 했을 때 부모님들은 ‘정말 대도시에서만 생활해 오다 다시 이곳으로 올 생각이냐?’라고 물었고 그럼에도 나의 뿌리를 다시 찾고 싶다는 생각에 돌아와 순회법원의 서기로, 그리고 메이지 히로노 의원이 주지사 선거에 나설 당시 참모로 일하기도 했다.
처음 하원에 출마하게 된 것은 내가 살던 카폴레이 지역이 얼마나 열악하게 설계된 도시인지를 깨닫게 된 이후 내가 한번 주위를 변화시켜 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면서인데 출마 선언을 하고 3일이 지나 아버지가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다.
6개월밖에 수명이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말을 전해 듣고 출마를 포기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내 손을 잡으시며 “내가 도와줄 테니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서 절망 속에서도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지지를 호소한 결과 10년 경력의 현직 의원을 제치고 당선됐다. 임명식에 아버지가 참석했을 때만큼 나 자신에 대해 뿌듯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이후 아버지께서는 2년을 더 사셨다.
어려서는 한국인이란 사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 그 자체가 한인을 나타내는 상징 그 자체라고 이제는 생각한다.
자긍심을 갖고 신념에 따라 노력하다 보면 주류사회에서도 부러워하는 한인들로 성장한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크리스 맥킨니 작가>
한인 모친과 하와이 현지인 사이에서 태어난 반쪽 짜리 한인2세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외조모가 한국의 유명 배우 - 조미령 이라는사실을 알게 된 것인데 지금은 80대의 고령이지만 예전에는 1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한국에 파병된 미국 군인 - 이미 미국에 부인과 자식들이 있는 - 과 사랑에 빠져 스캔들을 일으킨 외조모는 우리 어머니가 16살 때 하와이로 이민 왔다고 한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너무나 전형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어 말하기에 앞서 웃을 수 밖에 없다.
한국술집(코리안 바)에서 일하다 만난 손님과의 사이에서 나를 낳았고 친부와 헤어진 후 혼자서 마키키의 작은 아파트에서 나를 길렀다.
그 와중에도 카네오헤에 사는 전형적인 일본계 하와이 주민인 남성과 결혼했는데 주로 양아버지가 나를 키웠다. 함께 사냥도 다니고 낚시도 하면서 하와이 주민으로 성장한 나는 어머니 쪽 친척들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구성원이다.
솔직히 자라나면서 하와이주민으로 인정받고 싶었지 한국인으로 알려지고 싶지 않았다. 그건 종종 양아버지가 영어를 잘 못하는 엄마를 놀리는(물론 악의는 없었지만 말이다) 모습을 보면서 자라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얘가 이올라니에 입학허가는 받았는데 그냥 가기 싫어서 공립으로 들어간 거랍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친척어른들간에도 경쟁심리가 있어 꿀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러셨던 것 같다.
4살 때 첫 작품을 썼다. 난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너무 좋아해서 그분들이 앞으로 영원히 사시지 않을 거라는 걱정에 그분들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오래 전의 일들에 대해 물었고 한국에서, 그리고 하와이에 와서 생활하면서 겪은 일들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을 떠나 이민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정말 열심히 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어른들의 말이 지금에는 이해가 된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온 부모님과 그 선대의 이민자들의 노력에 깊이 감사 드리고 있다.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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