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은 국력’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있다. 맞는 말이다. 세계최강 미국은 작년 런던 올림픽에 529명의 선수단을 보내 종합 1위(메달 104개)를 지켰다. 주최국 영국과 중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등 10위 안에 든 나라들도 각각 300명 이상의 선수단을 보냈다. 하지만 남수단은 달랑 한명의 선수가 국기 아닌 올림픽기를 들고 입장했다.
한국은 248명의 선수가 28개의 메달(금13, 은8, 동7)을 따내고 당당 5위에 랭크됐다. 세계 10위권을 넘보는 경제대국답다. 북한은 51명의 선수가 5개의 메달(금3, 동2)을 따 20위에 올랐지만 굶어죽는 국민이 부지기수여서 국력과는 상관없다. 북한에선 스포츠가 곧 전투다. 금메달을 딴 사격선수가 “미제의 심장을 겨누는 정신자세로 쐈다”고 떠벌였었다.
그런데 미주 한인들은 신장된 한국의 스포츠 국력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특히 시애틀지역 한인 야구팬들에겐 ‘백추의 한’이 있다. 한때 매리너스에서 1군과 2군을 오가며 뛰었던 白차승과 秋신수가 6년전 시애틀을 뜬 뒤 한국선수는 그림자도 볼 수 없다. 어쩌다 서북미 지역에서 열리는 주요 골프대회에서 한국의 낭자 선수들을 보는 것으로 한을 달랜다.
한인들이 모국의 커진 국력을 실감하는 건 오히려 문화예술 분야이다. 요즘 세상을 풍미하는 싸이의 말춤 훨씬 전부터 ‘한류’로 통칭되는 한국문화가 범람했다. 거의 모든 한인가정이 한국 드라마를 시청한다. 한국영화가 시애틀에서도 잇따라 상영된다. LA의 세계적 야외음악당인 할리웃 보울에서는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연례 한국음악 축제가 열린다.
최근 시애틀지역 한인들이 ‘돈 주고도 얻기 어려운’ 문화체험을 공짜로 즐겼다. 대전 연정국악원 단원 80여명이 시애틀 베나로야 홀에서 깜짝 놀랄 수준의 환상적 공연을 펼치며 국악의 진수를 선보였다. 무대배경까지도 신경 써서 2,500석의 연주홀을 가득 메운 청중은 마치 경복궁의 근정전 앞뜰에서 정통 국악연주를 감상하는 둣한 착각에 빠졌다.
대체로 국악 상식이 얕은 한인들은 이날 수제천(궁중음악)이 뭐고 시나위(민속음악)가 뭔지 배웠다. 민요와 판소리와 고전무용의 오리지널을 접했다. 국악관현악단의 가야금, 거문고 주자들이 오케스트라의 첼로, 베이스 주자들처럼 한 동작으로 활을 움직여 화음을 일궈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 마지막 사물놀이에선 모두들 발장단을 맞추며 무아지경에 빠졌다.
이런 해외공연은 국립국악원도 벅찰 듯하다. 단원 80여명의 항공료, 숙식비에 악기와 장비의 수송료도 만만찮다. 베나로야홀 대관료도 엄청나다. 그런데도 무료공연이었고 공짜답지 않게 수준이 높았다.
대전시 문화단체의 시애틀공연은 이번이 두 번째다. 대전 시립교향악단이 9년 전 미주순회연주를 시애틀에서 시작했다. 당시 베나로야 무대에서 브루흐 협주곡을 신들린 듯 연주한 강동석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작년 4월엔 거장 정명훈의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베나로야홀 무대에 섰다. 시애틀심포니가 초청할 만큼 한국의 연주 문화수준이 높아졌음을 과시했다.
체력이 국력이라는 말은 한물 갔다. 사실은 맞지도 않다. 올림픽 때마다 마라톤을 제패하는 케냐나 100미터 경주의 ‘총알 챔피언’을 둔 베네수엘라는 강국이 못된다. 아마추어 선수를 프로처럼 훈련시키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대문을 아무리 걸어 잠가도 주민들은 몰래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한국가요를 따라 부른다. 체력이 아닌 문화력이 국력이다.
한인들은 본국정부가 주는 이중국적이나 선거권 못지않게 본국 문화예술단체의 수준 높은 공연을 보며 큰 위로와 자부심을 느낀다. 그래서 대전은 다른 도시들의 귀감이다. 대전을 자매도시로 가진 것이 자랑스럽다는 마이크 맥긴 시애틀시장 말이 허사가 아니다. 대전이 내 고향이래서가 아니다. 앞으로도 좋은 공연단을 계속 보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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