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시애틀타임스 1면에 중년의 동양계 치과 여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며 환하게 웃는 사진이 기사와 함께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한인인가 하고 봤더니 말레이시아 출신 화교였다. 이사콰에서 20여 년간 시술해오면서 2008년부터 형편이 어려운 제대 장병, 특히 상이용사들을 전국적으로 수소문해 자원봉사 차원에서 무료로 치료해주고 있다는 미담이었다.
치주염 전문의인 테레사 쳉이 지난 5년간 인술을 베푼 수백 명의 환자 중에는 20대 이라크 파병출신도, 87세 한국전 참전용사도 있다. 그녀는 자원봉사에 전념하려고 작년에 병원을 팔았고 킹 카운티 치과재단 이사를 지낸 경력을 바탕으로 동료 치과의사들을 ‘포섭’했다. 요즘은 35~40명의 치과의사들이 제대 장병 무료치료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생명을 다루는 의료인들의 커뮤니티 자원봉사는 고귀하다. 시애틀 한인사회에도 의료봉사단체 ‘코너스톤’이 매월 4차례 무료진료 활동을 벌인다. 최근 장로교 남선교회가 펼친 연례 무료진료 행사장엔 300여명의 환자가 몰렸다. 한 자원봉사 척추통증 전문의는 점심시간 15분을 빼고 온종일 쉴 사이 없이 환자들을 진료했는데도 시간이 모자랐다며 아쉬워했다.
미국은 발런티어의 나라이다. 이웃동네에 홍수가 나면 너나없이 달려가 모래주머니를 쌓아준다. 학교 앞 건널목의 자원봉사 안전요원들도 대부분 학부모이다. 박물관 등 공공시설에서 안내원으로 자원봉사하는 노인들도 많다. 빈민들을 위해 직접 톱질과 망치질을 하며 집을 지어주는 ‘인류애를 위한 주택’ 봉사단체도 있다(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회원이다).
자원봉사 전문단체들인 YMCA와 YWCA가 150여 년전, 적십자사가 120여 년전 결성됐다. 그 후 구세군, 라이온스, 로터리, 키와니스 등이 등장했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0년 해외봉사단체인 평화봉사단을 창설했다. 미국의 ‘포천 500’ 대기업 중 절반 가량이 직원들의 자원봉사 활동시간에 상응하는 금액(‘발런티어 그랜트’)을 해당 비영리단체에 기부한다.
자원봉사자들에겐 자기 이익보다 사회 또는 공공의 이익이 우선한다. 금쪽 보다 귀한 자기의 수명(시간)을, 그것도 노역까지 곁들여 기꺼이 할애한다. 이타심의 발로, 자기 삶의 질을 높이거나 체험을 다변화하려는 의도, 사회 고위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감(‘노블리스 오블리제’), 또는 섬김을 중시하는 신앙심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
나는 지난 주말 ‘빚을 갚기 위해’ 자원봉사에 참여했다. 시애틀산악회의 일원으로 외진 킹 카운티 공원에서 6시간동안 새 등산로를 만들었다. 벌써 6번째다. 두터운 부엽토층을 맨 흙이 나올 때까지 파 제쳤다. 나무뿌리를 자르고 돌멩이들을 거둬내느라 무척 힘들었지만, 남들이 만든 등산로만 다닌 우리도 남들을 위해 등산로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더 컸다.
시애틀산악회는 비영리 봉사단체인 워싱턴주 등산로협회(WTA)가 주관하는 산길 보수작업에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참가한다. 작년엔 시애틀산악회 회원들을 포함해 2,7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주 전역에 산재한 170여개의 등산로를 손질했다. 기회가 아무에게나 쉽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15~20명의 단체가 2개월 전에 WTA에 신청해야 장소를 지정받는다.
창고에서 인심 난다는 말은 자원봉사에도 적용된다. 남의 도움만 받았던 한국인들도 형편이 좋아진 2000년대 들어 비로소 자원봉사에 눈을 떴다. 미국인들의 ‘자원봉사 대각성’ 보다 150여년 뒤졌다. 한국정부는 지난 2005년 ‘자원봉사활동 기본법’을 제정하고 12월 5일을 ‘자원봉사자의 날’로 지정했다. 이날은 유엔이 정한 ‘세계 자원봉사자의 날’이기도 하다.
페더럴웨이 한인회는 올해도 우수 자원봉사 고교생 5명을 뽑아 500달러씩 장학금을 지급한다. 코너스톤의 변재준 원장은 지난주 주류사회로부터 커뮤니티 봉사 챔피언 상을 받았다. 머지않아 한인 판 테레사 쳉도 신문에 보도될 터이다. “남을 위한 봉사는 자기가 발붙이고 사는 지구에 내는 임대료”라는 떠버리 무하마드 알리의 말이 생뚱맞지 않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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