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에 일어난 가슴 아픈 얘기다. 같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이 모 집사의 아들 J군이 노상강도에 의해 생명을 잃은 어이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대학 4학년이던 J군은 어느 날 저녁 친구를 만나러 한 아파트 단지로 가고 있던 중 강도가 20달러를 뺏고는 권총으로 그의 목숨을 끊은 것이다. 범인은 다른 곳에서 같은 범죄를 저지르다가 사건 2달 후 체포됐으며 범행을 자백했다.
재판은 배심제로 진행됐다. 이 재판은 한인사회에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이 지역의 많은 한인들이 재판에 참석했다. 나도 재판을 방청했다. 판사 검사 변호사 모두 흑인들이었다. 그리고 배심원 12명이 모두 흑인이었다. 피고인은 증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행자백을 뒤엎었다. 배심원들은 피고인 쪽으로 손을 들어줬다. 즉 12명 만장일치로 무죄평결을 낸 것이다. 배심원들은 사실에 입각하기보다 인종적인 면에서 편파적으로 결정했음이 분명했다.
한인단체들은 물론 지역 언론도 배심원 평결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지역 한인들과 뜻을 같이하는 미국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시위에 참석했던 나의 마음은 착잡했다. 공평하고 인권에 입각한 재판이 최대한으로 보장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 사법부에서 일어난 ‘오판’이기 때문이었다.
아들을 잃은 부부는 불공평한 평결을 여러 관계기관에 호소했지만 누구 한 사람 도와주지 않았다. 그 후 부부는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작은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 집사가 군 관계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때인 10년 전 서울 미 8군사령부 한 식당에서 만났다. 우리는 이날 30여년 동안 같이 교회를 섬겼던 이민생활로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부부의 가슴 속 아픈 상처는 신앙으로 극복하려 해도 아물지 않았다.
배심원 제도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영미 사법제도의 특징으로 국민이 직접 재판에 참여함으로써 법관이 재판을 독점하여 법적용에 있어서 지나친 편견과 오류를 범하는 경우를 막고, 사회적인 정의와 공동체의 윤리기준을 반영하지는 뜻에서 세워진 이를테면 ‘법관의 횡포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이다.
그러나 미국 배심원제도의 역사를 보면 많은 흑인과 유대인들이 백인 배심원들의 편견적인 평결에 의해 불의한 언도를 받은 예가 허다하다. 또 근래에 와서는 흑인 배심원들의 인종적 평결에 의해 억울함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인종적 편견문제가 크게 대두된 재판은 1995년 풋볼선수 O.J. 심슨의 살인혐의 사건이었다. 심슨은 1994년 자신의 전처와 전처의 친구를 살인한 혐의로 배심원 재판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으면서 미국 내 여론을 흑백으로 완전히 갈라놨다. 결정적인 물증까지 있어서 유죄가 확실시 될 것으로 보였던 이 재판은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흑인 8명, 백인 2명, 기타인종 2명으로 구성된 배심원은 만장일치 유죄평결에 실패했다. 심슨은 피해자 가족이 제소한 민사재판에서 살인죄를 언도받고 수백만 달러의 배상금 형을 받았으나 아직 갚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도 배심원 제도와 흡사한 국민참여재판 제도가 5년 전에 도입됐다. 그 동안 여러 재판과정에 이 제도가 적용됐으나 큰 무리가 아니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과 동생 지만 씨와 관련된 사건들이 국민참여제도에 의해 평결을 받으면서 정치적인 이슈가 되었다.
지난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당시 문재인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 안도현 시인, ‘시사IN’ 기자 주진우 씨, ‘나는 꼼수다’의 진행자 김어준 씨가 1심에서 재판부가 배심원들의 평결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여권이 ‘지역주의 평결’이라는 이유를 들어 비난을 퍼부었다.
안 시인은 대선 당시 자신의 트위터에 ‘박근혜 후보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훔치지 않았나’하는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주 씨 등은 박지만 씨가 그의 5촌 조카 피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주장해서 기소된 것이다.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국의 인종주의 또는 한국의 지역주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는 배심원제도가 본분을 다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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