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 이민사연구원
1903년 1월13일에 도착한 102명을 시작으로 1905년 8월에 한인의 이민이 끝날 때까지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이민자는 약 7,400명이었다.
1905년 5월 7일에 박윤섭, 송헌주 등 몇 명의 한인감리교회 교인들이 감리교 감리사 존 와드맨의 집에 모여 2,000달러를 약정하면서 감리사에게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샌프란시스코 주재 감리교 감독 존 해밀톤은 곧 하와이 전도회에 연락하여, 매물로 내어놓은 펀치보울과 베레타니아 길 모퉁이에 있는 구 북태평양학교를 구입하였다. 구입 가격 18,000달러는 한인의 약정금 2천달러서양 친지에게서 1천달러 하와이 전도회에서 5천달러 그리고 감리교 국내선교와 교회확장부의 1만달러등으로 충당하였다.
드디어 1906년 가을 학기에 한인기숙학교가 개교되었고, 곧 이어 에마와 스쿨 길모퉁이의 셋방에서 예배를 드리던 한인감리교회도 이사 들어왔다. 이곳은 학교와 교회가 함께 있다고 하여 “코리안 캄파운드”로 불러지게 되었다. 첫 학기에 65명 학생이 8학년까지 등록하였다. 미국인 교사 3명과 한국인 교사 2명이 가르쳤고 이지성이 기숙사 사감이었다. 1907년에는 정규학교로 인정을 받아, 졸업생은 어느 고등학교에라도 진학할 수 있었다. 기숙학교였지만, 밀스 (고등)학교 (현 미드 패시픽 학교)등 다른 학교에 다니는 한인 학생 몇 명이 기숙하였다. 1909년에 졸업한 첫 졸업생 6명의 대부분이 밀스 학교로 진학하였는데, 그 중 양유찬은 맥킨리 고등하교로 진학하였다. 반세기 후 양유찬은 대한민국 주미대사가 되었고, 1959년 11월에 있었던 하와이 주 승격 만찬에서 축사를 하는 자랑스런 하와이의 한인이었다. 1913년 8월에 와드맨 감리사는 이승만 박사를 한인기숙학교 2대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승만은 곧 학교 이름을 한인 교육의 중심이라는 뜻에서 한인중앙학교 (흔희 중앙학원으로 부름)로 고쳤고 여학생을 입학시켰다. 그리하여 한인중앙학교는 한인 학생을 위한 한국 내외의 첫 남녀공학 학교가 되었다.
이승만이 교장이 되면서 학생 수는 120명으로 증가하였다. 여학생도 1913년 가을 첫 학기에 5명이었는데, 1914년 봄 학기에는 24명으로 증가하였다. 여학생을 위한 기숙사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여학생들은 감리교 여선교부가 운영한 웨슬리 홈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여선교부 임원들이 한인 여학생이 중앙학교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였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라 의아해 하였는데, 학교설립 당시 해밀턴 감독이 마련한 기금이 바로 여선교부에서 나온 것이고, 한인기숙학교는 남학생만을 위한 학교라는 조건이 있었던 것을 여학생을 입학시킨 후에 알게 되었다. 여학생 교육은 여선교부의 책임이며 권리라는 조건을 위반한 것이 되었다. 이승만 교장 이전에는 남학교였음으로 와드맨 감리사는 이 조건을 문제시 하지 않았다. 그리고 1913년 11월 이승만을 교장으로 임명한 후 두달만에 이 조건을 까맣게 잊고 이승만에게 알리지 않고 사임하였다. 1914년 3월에 새로 부임한 윌리암 프라이 감리사는 물론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여학생 수가 증가하지만 감리교 여선교부와의 관계가 해결되지 않아 이승만은 할 수 없이 학교 근처에 집 한 채를 빌려 학생들을 이사시켰다. 그러나 집은 너무 비좁았다. 이승만은 한인들에게 호소하여 여학생 기숙사 기금 모집을 하였고 1914년 가을 학기에는 푸우누이 길에 집을 구입하였다. 그러나 기숙사와 학교가 2 마일이나 떨어져 있어 학생들이 매일 걸어 다니기가 어려웠다. 조금 더 기금을 모아 기숙사 옆의 땅 (현 오아후 컨트리 클럽 골프장 뒷끝)을 구입하여 시설을 확장하고, 아예 1915년 가을 학기에 한인여학원으로 개교하였다. 여학생기숙사와 한인여학원 설립 기금 대부분이 한인들의 성금으로 이루어졌고 하와이 감리교선교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은 한인여학원을 하와이 감리교선교부에서 독립된 학교라고 인식하였다. 더구나 한인여학원을 개교하기 6개월 전에 이승만은 중앙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인여학원 개원식에 전 감리사 와드맨과 프라이 감리사를 초청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와드맨은 한인여학원은 사탕수수농장의 여학생에게 미국 교육의 기회를 주려는 이승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치하하였다. 이즈음에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에게 남학생 기숙사 책임자로 임명하였고, 많은 이들이 한인여학원에 남학생도 받아주기를 요청하였다. 드디어 1918년 봄 학기에 이승만은 학교에서 한 길 떨어져 있는 곳에 집을 마련하고 남학생들이 이 집에 기거하면서 한인여학원에 다니게 하였다.
이승만은 1918년 가을 학기에 한인여학원을 정식으로 남녀공학제로 재조직하면서, 학교 이름을 한인기독학원이라 하였다. 1915년 한인여학원이 설립된 후에도 한인중앙학교는 66명의 남학생들로 계속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1918년 한인기독학원이 개교되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인기독학원으로 전학하였다. 하와이 감리교선교부는 도저히 학교를 운영할 수 없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감리교선교부는 방화중, 이선일 등 감리교 목사에게 1,200달러의 보조금을 주면서 독자적으로 학교를 운영할 것을 요청하였다. 감리교선교부가 하와이에서 운영한 유일한 학교가 폐교된 것으로 감리교선교부는 더 이상 학교를 운영하지 않았다. 방화중, 이선일 등이 한인이사회를 조직하고, 방화중, 황사용 등이 1920년까지 “코리안 보이즈 스쿨” 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다가 문을 닫았다. 감리교선교부는 1922년에 학교 부지를 매각하였고, 감리교회는 1520 퍼트 스트리트로 이전하였다. 1915년에 새로 지었던 교회당을 부분으로 나누어 새 장소로 이전하였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