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기 수모 속에 베를린 올림픽(1936년)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보다 20여년이나 앞서 한민족의 사기를 드높여준 영웅이 있었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노래의 주인공 엄복동이다. 그가 1913년 조선 자전거 경주대회에서 일본선수들을 누르고 우승하자 조선 국민들이 너도나도 이 ‘금지 가요’를 불렀다.
여자선수 중에도 김연아나 박인비보다 반세기 이상 앞선 원조영웅이 있다. 나의 히로인이었던 농구선수 박신자다. 대학생 시절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그녀가 주장으로 출전한 한국팀을 응원하기 위해 ‘알바’인 주제에 주머니를 털어 예선과 결선 경기를 모두 참관했다. 젊었을 때지만 내게도 그런 열정이 있었다는 게 신통하다.
박신자가 프라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준우승을 안겨준 1967년에도, 김기수가 한국최초로 프로권투 챔피언이 된 1966년에도, 이 에리사가 이끄는 한국대표 팀이 세계 탁구선수권대회를 제패한 1973년에도, 홍수환이 남아공에서 “챔피언을 먹은” 1974년에도, 양정모가 광복 후 첫 올림픽 금메달(레슬링)을 딴 1976년에도 한국국민들은 열광했었다.
스포츠는 묘하다. 자국 선수나 홈팀이 이기면 기고만장이다. 응원단간에 패싸움이 벌어지고 경기장이 경기(驚氣)를 일으키기 일쑤다.
이번 수퍼보울 챔피언으로 등극한 시애틀 시혹스 팬(12맨)들의 응원 열기는 광기에 가깝다. 시혹스가 득점할 때보다 상대팀이 공격할 때 더 크게 함성을 질러 적군의 얼을 빼놓곤 한다. 홈구장 센추리링크 필드가 세계최고 소음 스타디움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원래 올림픽은 각국 엘리트 간의 친선교류 행사로 출발했다. 메달집계도 없었다. 그러나 2회 대회부터 국가 간, 민족 간 대결의 장이 돼버렸다. 손기정이 영웅으로 뜬 베를린 올림픽의 100미터 경주에서 미국의 전설적인 흑인 육상선수 제시 오웬스가 독일 유망주를 누르고 우승하자 관전하던 히틀러가 “원숭이 검둥이…”라며 욕을 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게다가 월드컵 축구가 지구촌 최대 단일 스포츠 이벤트로 자리 잡으면서 국가 간 라이벌 의식이 더 굳어졌다. 1969년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가 월드컵 예선경기 후 시비가 벌어져 닷새간 소위 ‘축구전쟁’을 치렀다. 시애틀 한인들도 단체로 모여 한국 월드컵 축구팀을 응원한다. 만일 한일 대결에서 한국 팀이 지기라도 하면 한국은 온통 초상집이 된다.
미국인들은 국제대회보다 국내경기에 더 열광한다. 최고인기 종목인 수퍼보울은 TV중계 시청률이 40%를 넘나든다. 자본주의 종가답게 돈 바람이 거세다. 수퍼보울 경기장 입장권이 2만5,000달러까지 치솟았고 30초 TV 광고료가 자그마치 400만 달러나 되었다.
그런 열풍이 내달 또 한번 분다. ‘3월 광란’으로 불리는 전국대학연맹(NCAA) 농구경기다. 프로농구(NBA)와 프로야구(MLB)를 능가하는 No. 2 인기종목이다. 투자의 귀재라는 워렌 버핏이 NCAA의 67경기 승리 팀을 완벽하게 맞추는 사람에게 10억 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안 그래도 매년 NCAA 경기의 승부도박 사이트엔 수천만 달러의 상금이 걸린다.
박신자 팬이었던 나는 ‘보는 스포츠’보다 ‘하는 스포츠’ 쪽이 됐다. 이민 직후 LA 다저스 야구장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테니스에 재미를 붙이면서 시들해졌다. 시애틀에 온 뒤 등산에 빠져 매리너스 야구장엔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연례 ‘코리아 나이트’ 게임이나 보러 간다. 시혹스와 사운더스(축구팀) 홈구장인 센추리링크 필드엔 여태 한 번도 못 가봤다.
은퇴(1967년) 후 주한 미 대사관 문관과 결혼해 나보다 훨씬 먼저 재미동포가 된 박신자는 1999년 세계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테네시 주)에 한국인 최초로 헌액됐다. 현재 하와이 아들 집에 산다는 그녀는 그 나이(74)에 거기서 서핑을 즐길지 모른다. 요즘 산책하거나 짐에 나가는 노인들이 많다. 건강을 위해 ‘하는 스포츠’에 주력하는 게 추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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