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한국일보 창간 42주년과 그에 즈음해 맞는 아버지 날의 특별한 의미를 더하고자 요청한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자는 취재현장에서 여러 차례 선친을 회고하며 그분이 남긴 격언들을 인용하는 문 대법원장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대법원장의 오늘이 있게 한 선친에 대한 추억과 이민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문: 우선 한국일보의 창사 42주년을 축하하며 이번 특집기사를 통해 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준 한국일보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한국일보 하와이는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지역 내 모든 주민들에게 정확하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함으로 커뮤니티 언론사로서의 그 역할을 충실히 맡아 왔다고 본다. 내가 비록 한국어를 다른 친척들 만큼 능숙하게 사용할 수는 없지만 주위 사람들로부터 귀사는 항상 공정하고 정확한 정보의 전달을 중시하는 보도매체라는 점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문덕만(영어명 듀크, Duke)은 렐레후아 고교를 졸업한 파인애플과 사탕수수 농장 근로자 출신으로 나중에는 어머니 메리 문과 함께 와히아와에서 ‘듀크 양복점’이란 작은 점포를 운영했다. 부모님은 여느 이민자들과 같이 주 6일, 하루 12시간 이상을 자식들을 위해 일하며 몸소 사업운영에 관한 노하우를 쌓아나갔다. 긍정적인 사고와 강한 동기부여를 통해 4명의 자식을 미 본토의 대학에, 특히 2명의 아들은 법대에까지 진학시킬 정도로 자녀교육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셨다.
생전에 모든 것을 직접 체험과 경험을 통해 자력으로 습득했던 아버지는 비록 5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분의 노력에 의한 결실로 자식들은 물론이고 온 가족이 덕을 입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이 밖에서 배워온 지식을 자식들에게 전해주고자 했고 밖에서 일어나는 이슈, 특히 일제로부터의 한국의 독립과 한국전쟁 등에 관한 역사적 사건들은 아버지로부터 거의 다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혼자 힘으로 철학과 심리학, 역사, 인문학 등을 공부했고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해야 할 때면 자신이 배운 것들을 상황에 적절하게, 그러나 유머러스하게 청중들에게 전달할 줄 아는 인텔리 한 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게를 꾸려나가면서 자식들을 키우고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셨던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와히아와 한인상인협회의 초대회장으로, 그리고 라이온스 클럽, 로터리 클럽, 와히아와 한인교회, 태극클럽, 한인 커뮤니티 협의회, 한미클럽, 동지회, 그리고 한인 선교회 등의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며 당신이 만난 모든 이들을 존중과 배려, 인내심을 담아 정중하고 진솔 된 자세로 대했다. 때문에 지역 사회 내에서도 단지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다시 말하지만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인격과 성품, 총명함, 그리고 상식과 유머를 겸비했기 때문에 모두가 우러러 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항상 강조하셨던 덕목 중에서도 ‘겸손해야 한다’는 그분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사진설명: 문 전 대법원장(가운데)이 의사로 활동 중인 아들 딸, 쥴리와 스캇과 함께 자리했다.>
법학대학원에 진학하기 전 여름방학 동안 집안일을 거들러 잠시 하와이에 머물 당시 가게에 나간 첫날 나는 소매가 긴 와이셔츠에 말끔한 차림을 하고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하며 내 모습을 보고 흐뭇해 하실 아버지를 기대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론(Ronald의 애칭), 저기 빗자루를 들고 가게 앞을 청소해 주겠니?”라고 청했다. 그래서 “아버지, 전 이제 대졸자라고요”라고 답했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아 (네가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을), 내가 잠시 잊어버렸구나, 자 따라와 (어떻게 빗자루를 쓰는지 모른다니까) 내가 직접 보여줄게”라며 법대입학을 앞둔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결국에는 빗자루를 들게 하셨던 일이 생각이 난다.
나의 부모님은 1903년부터 1905년 사이 한국인들이 하와이에 첫발을 내 디딘 이후 1919년 와히아와 한인교회를 설립한 초기 이민그룹의 일원으로 아버지와 그 형제들은 교회가 주최하는 행사와 사회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셨고 우리 형제들도 대학에 입학할 때가지 매주 교회 주일학교와 수요일 성가대 연습, 그리고 국제기독면려회 등의 활동에 참여해야 했다.
내가 12살 때 와히아와 YMCA의 ‘청년십자군’의 회원으로 모금활동을 하기 위해 일요일 아침에 이웃을 돌며 사탕을 팔러 나가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허락을 얻기 위해 이 같은 사실을 말했더니 아버지는 “YMCA가 무슨 뜻인지 말해보렴”이라고 저에게 물었다. 이에 내가 “기독청년회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씀 드렸다. “그래, 하지만 기독교인이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지 돈을 벌려고 사탕을 팔러 다녀서야 되겠니?”라고 하신 후 YMCA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고 모금 일정을 토요일로 바꾸게까지 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는 주위의 노인들을 돌보는데도 항상 앞장섰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문편지를 대신 써 달라거나 영어로 된 문서를 한글로 번역해 달라며 어르신들이 가게로 찾아오면 할 일이 많은데도 절대 바쁘다는 핑계 한번 대지 않고 일일이 도움을 주셨다. 병원에 가야 하지만 교통편이 없다는 분들의 경우 직접 차를 몰고 모시고 갔고, 결국 그분들의 장례식까지 치러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아버지가 1970년 6월9일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고교동창이자 우리가족들과도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레이첼 리가 영결사를 통해 아버지가 예전에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가 병상에 누운 아버지께 보내온 편지의 일부를 낭독했는데 그 내용을 한국일보 독자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다.
“저희 남편과 저는 항상 선생님의 쾌차를 바라며 매일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 믿습니다. 제 기억에도 선생님은 우리가 바르게 자라도록 아낌없이 시간과 노력을 쏟아 주셨고 주일학교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교회업무에 봉사하시는 모습을 보며 어린 우리가 느끼기에도 교회에 다니는 여러 어른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분이라고 생각했지요. 특히 제가 지금의 훌륭한 여성이 되기까지, 아니 저뿐만 아니라 남의 자식이지만 우리 모두가 잘 자라길 바라며 헌신하셨던 모습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선생님께서 저희들에게 심어주신 감명과 지도는 앞으로도 영원히 저희와 함께할 것임을 약속 드립니다. 오는 6월에 콜롬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를 받게 됐어요, 선생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쾌유를 기원 드립니다.”최고의 멘토이자 모범이 되는 아버지를 지면을 통해 독자 분들께 소개해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준 한국일보에 다시 한번 감사 드린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와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는 정말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설명: 할아버지 품에 안긴 대법원장; 문 대법원장(뒷줄 왼쪽)의 청년 시절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한 가족사진>
질문: 아버지로서 대법원장님의 자녀 분들에게 심어준 가치관은 무엇일까요? 가장으로서 지켜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문: 상기 답변에서도 언급했지만 가장으로써 아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던 것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함은 물론 성실함을 다 하라는 점이었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자신들이 만나는 모든 이들을 그들의 사회적 배경이나 처한 상황을 보지 말고 존중하며 평등하게, 그리고 인내와 자비를 갖고 진솔한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일에 성심과 최선을 다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진설명: 문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장 은퇴식 후 계부(작고)와 모친, 부인, 딸과 함께했다. (오른쪽부터)>
질문: 소수민족 이민자의 후손으로 지금의 자리에 자신이 있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주류사회에 뛰어들 사회초년생들에게 조언을 해 주신다면?
문: 소수민족으로서 한인들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1962년 당시에도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비주류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민족들이 처한 어려움은 지난 42년간 많이 호전된 상태로 보고 있다.
한 예로 1965년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하와이로 돌아왔을 당시만 해도 백인들이 경영하는 5개 거대 기업들이 하와이를 좌지우지 하던 때였다. 때문에 소수민족출신을 기피하고 백인만을 법률자문으로만 채용하던 당시 대기업들의 관행 때문에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인종의 변호사들도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은 그 당시의 5대 기업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하와이원주민이나 일본계, 중국계, 필리핀계, 한국계, 베트남계 등 소수민족출신의 주민들이 오히려 백인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성향은 하와이, 혹은 미 본토 일부 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주류사회’에 진출하려는 사회초년생들에게는 그들 자신이 이제는 ‘주류’라는 점을 자각하고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과연 어느 범주까지가 주류로 판단해야 하며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이다.
선친께서는 “공익활동은 우리가 지구상에 살아가면서 지불해야 하는 일종의 세금과도 같다”고 말씀하셨다.
젊은이들은 우선 주위에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돕는 비영리단체를 찾아 마음을 다해 봉사할 것을 권장하며 헌법이 부여하는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함은 물론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가할 것을 지명 받았을 경우 기꺼이 출두해 시민의 의무를 다할 것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변화와 혁신이 요구될 경우 어떻게 지방과 연방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지에 대한 노하우를 쌓고 비록 국적은 미국이지만 자신들은 한인의 후예임을 잊지 말고 자긍심을 갖고 살 것을 주문하고 싶다.
<사진설명: 하와이 주 대법원에 걸려 있는 초상화>
질문: 한인사회의 원로로서 현재 한인사회를 이끌어나가고 있는 이민자들과 초기 이민선조들의 모습을 비교하자면 무엇이 다르고 우리가 선조들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문: 우선 초기 이민사회와 지금의 한인사회를 비교하기에 앞서 자신들의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을 모색해 온 선조들과 오늘날 한인들의 노력에 찬사를 바치며 감사를 표한다. 지금의 한인사회가 해결해야 할 이슈들은 초기 이민선조들이 감내해야 했던 사탕수수농장의 어려운 근무환경이나 사회적 문제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당시 한인들은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소수민족이란 이유의 서러움뿐만 아니라 영어를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도 차별 받았고 개개인의 노력으로 주류사회로 뛰어들려던 이들도 2등 시민에 머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때문에 소수민족 출신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능력을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는 지금이 있기까지 각고의 노력으로 그 기초를 다진 선조들에게 우선 감사 드리고 싶다. 그리고 서로가 처한 문제와 이견들을 좁히는 방안으로는 커뮤니티 내에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적극 활용할 것을 권하고자 한다. 한 예로 하와이원주민들은 타지에서 온 이민자들과의 문제를 ‘호오포노포노(Ho’opono’pono)’로 알려진 전통적인 방법으로 해결했고 지금에 와서도 업체나 단체들간의 이견을 하와이 전통에 따라 해결하는 방법이 아직도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더불어 ‘소송 외 분쟁 해결기구(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ADR)’에서도 상기 소개한 ‘호오포노포노’를 포함해 다양한 방법으로 양자가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해 시간과 비용이 막대하게 들어가는 법정재판을 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인들도 하와이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쪽을 선호한다고 믿는다.
이민자들뿐만 아니라 하와이 모든 주민들에게도 항상 권하고 있지만 분쟁이 해결되지 않을 때에는 위에 소개한 ADR을 활용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법정투쟁이나 미디어를 동원하는 것은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양자 누구도 결국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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