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탓인지 하와이 지사에서 1년 반가량 일했었다. 지상낙원이라지만 40대 중반 한창 나이의 객지생활이 금방 따분해졌다. 어느 주말 아침 파적을 겸해 작심하고 찾아간 곳이 있다. 호놀룰루에서 약간 떨어진 육군 스코필드 병영과 할로나 코브 해변이다. 당시보다도 20년쯤 전 대학생 시절에 인상 깊게 본 명화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촬영된 곳이다.
아카데미 8개 부문(지명은 13개) 수상작인 이 1953년 흑백영화는 버트 랭카스터 상사와 그의 직속상관 중대장 부인인 데보라 카가 할로나 코브의 바닷물 깔린 백사장에서 벌이는 달밤 정사 씬이 압권이지만 실제로는 권투선수 출신 나팔수인 몽고메리 클리프트 일병과 그의 부대 짝꿍인 프랭크 시나트라 일병에게 가해지는 혹독한 기합이 전편에 이어진다.
클리프트 일병은 부대대표 권투선수로 출전하라는 중대장 명령을 거역한 후 시련을 겪는다. 완전군장으로 혼자 연병장 구보기합을 받을 때 시나트라 일병이 나란히 뛰어주는 장면이 웃겼다. 시나트라는 상사에게 폭행당한 뒤 클리프트의 팔에 안겨 죽는다. 그 상사를 죽이고 탈영한 클리프트는 진주만 폭격날 밤 몰래 귀대하다가 보초병의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영화를 입대 전에 보길 잘했다. 논산 훈련소를 거쳐 영천(대구) 헌병학교에서 8주간 훈련받으며 허구한 날 기합 받고 ‘빳다’를 맞았지만 선진국인 미국 군대에도 기합이 있다고 생각하며 참았다. 영천의 바로 옆 경리학교에서 나보다 3년 먼저 훈련받았던 형은 내가 헌병학교에 입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맙소사! 걔가 이제 죽게 됐다”며 비통해 했단다.
기합보다 더 고약한 게 부패다. 원리원칙을 내세우는 헌병학교지만 8주 훈련기간 중 한 번도 교육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녀석이 졸업식 날 1등상을 받고 최고 선호부대인 서울 헌병감실로 배치됐다. 동기생들이 1등일 것으로 점쳤던 나는 ‘빽’도, 돈도 없어 생애 첫 수석 기회를 놓치고 2등이 돼 수도경비사령부로 배치됐다. 기합 받는 것보다 더 가슴이 쓰렸다.
경비사 헌병중대에 전속된 후 ‘대포 빳다’를 맞았다. 한 병사가 내무반에서 자다가 돈을 도둑맞았다고 신고했다. 당직 장교는 전 부대원을 집합시키고 해당시각의 불침번을 호출했다. 나와 대학선배인 P상병이 불려나갔다. 장교는 우리를 엎드려뻗치게 한 후 건축자재 기둥으로 엉덩이를 내려쳤다. 분실신고는 가짜로 판명됐지만 우리는 휠체어를 탈 뻔 했다.
원래 털털한 나는 헌병대 복무가 더 힘들었다. 매주 내무사열 때 ‘복장불량’으로 걸려 기합받기 일쑤였다. 군복에 주름이 칼처럼 서 있고 워커(군화)도 파리가 낙상할 만큼 빤짝거려야했다. 장난 같은 기합도 흔했다. 잠자다가 팬티바람에 헬멧 없는 맨 철모를 쓰고, 한쪽 발엔 워커, 다른 발엔 통일화(운동화)를 신은 채 ‘앞에 총’ 자세로 연병장을 구보했다.
세월호 사건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윤일병 사건’이 터져 한국이 또 시끌시끌하다. 세월호 참사 다음 달인 4월 육군 신참 윤일병이 선임병사 4명의 상습적 집단폭행과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사망한 사건이다. 늘 그랬듯이 윤일병 사건도 석 달 동안이나 감춰져 있다가 지난달 말 윤일병의 친척이 줄을 댄 국회의원과 변호사를 통해 참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윤일병이 당했다는 기합의 야만성에 쇼크 먹었다. 나도 한때 헌병대에서 ‘윤일병’으로 불렸지만 그 시절 당한 ‘대포 빳다’는 양반이었다. 그는 부대전속 후 한 달간 매일 폭행당했다. 얻어맞고 쓰러지면 링거 병을 꽂은 채 맞았다. 치약 한통을 먹기도 하고, 성기에 화공약품이 칠해지기도 했다. 선임병이 뱉은 가래침을 핥기도 했다.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
한국이 선진국대열에 진입했다고 떠들지만 병영은 캄캄한 후진국이다. 3공, 5공 시절의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다. 선임병이 신참을 때려죽이는 군대가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일본 제국주의 군대보다 인권차원에서 나을 게 뭐 있나? 육군참모총장 사임만으로는 어림없다. 속속들이 썩은 체질을 바꾸지 않으면 ‘지상에서 영원으로’ 사라지는 병사가 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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