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엿새째 되는 날 이민국 직원이 오렌지가 들어 있는 봉지를 전해주면서 “유어 허즈밴드 마꾸리” 라고 했다. 마꾸리 [마쿨레 makule: ‘늙은이’이라는 하와이 말]가 무슨 말인가 궁금하여 저녁에 밥을 주는 일본 여자에게 “마꾸리가 난데스까?” 라고 물었더니 “오지상” 이라고 알려주었다. (천연희는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그날 밤 속상하여 밤새도록 잠을 못 잤다. 다음날 이민국에서 문답을 받을 때 유명옥씨가 통변 (통역)을 해 주었는데, 정혼한 사람 이름, 나이, 일 하는 장소 등을 말해야 했다. 마우이 섬 파이아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는 길찬록으로 나이는 39세라 했더니, 이민국 직원이 남편 될 사람의 나이가 다르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길찬록이 와서 가방을 받아 들고 “수만리 타국에 오느라고 수고했다”고 인사말을 하는데, ‘마꾸리 라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이어서 인사말도 안 들리고 천지가 아득하고 낙망하여 아무 생각이 없었다.’ (유명옥은 1904년 8월 11일에 21세 독신으로 충청도 서안에서 왔다. 1915년 2월에 신부 곽공이를 위해 여권을 발급 받았다.) 천연희가 도착하기 1년 전에 벌써 한인 사회에서 사진신부에 대하여 말들이 많았다. 《국민보》는 1914년 3월 7일자 1면 첫 난에 <합중국 중앙정부에서 사진혼인을 금지코저> 라는 제목으로 이민국 총감이 상공부에 보고하면서 사진혼인을 금지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고 자세히 보도하였다. 이민국 총감의 지위와 그가 일본인 배척의 주동자임을 감안할 때 앞으로 사진혼인이 필경 금지될 것 같다고 부언했다. 계속하여 2면에는 <하와이가 낙원이냐 지옥이냐?> <사진혼인의 결과가 인도를 멸망> <일인의 악풍이 한인에게 전염> <수 십 원 혼인구문이 사람의 일평생을 그르게 함> 이라는 여러 작은 제목을 곁들인 전면 사설 (주필 박용만)이 실렸다. 내용은 한인사회에서도 성행하는 사진신부 결혼이란 소위 사진혼인 중매자들이 산아희[사나이]들을 하와이 은행가, 실업가, 대학생, 또는 애국지사라고 속여 적어도 학교 바람을 쏘이거나 예수교의 공기를 먹은 본국 여자들과의 결혼을 주선하니, 불행한 결혼이 된다는 것이다. "비록 사진으로 혼인하되 오직 진실한 말로 소개하여 사람의 평생화복을 수 십 원 금전으로 죽이지 말지어다." 더군다나 남편 될 사람을 소개할 때에 국민회 회장 서기라거나 예수교회 권사니 조사 등의 직함을 빙자하며 감언이설로 꼬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지들이 고생 끝에 도착하여 보면 중매자의 말이 다 거짓이며 신랑의 편지가 다 헛됨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소위은행가, 실업가, 대학생, 애국지사가 다 일찍이 은행의 이름도 모르던 사람이요, 실업의 구경도 못하던 사람이요, 대학교는 고사하고 소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사람이요. 애국성은 고사하고 망국한도 모르는 사람이다. 더구나 국민회 임원이나 예수교 임직원이라고 하는 것은 더 기가 막히다.”라는 것이다.
이 사설이 한인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것 같다. 다음 호 11일 자 《국민보》에는 <사진혼인 문제에 대하여 한번 다시>라는 제목으로 전면 사설을 또 실었다. 내용은 먼저 번 사설이 남자들을 너무 치고 여인들을 너무 추(기)어서, 이제는 계집들이 머리를 들고 사나이들을 구박하리라고 염려들을 한다는 것이다. "국민보의 원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며, "여자들이 본국을 떠난 본의는 외국 유람한 애국지사 남편을 얻어 그의 힘을 의뢰하여 공부도 더 하고 사업도 경영하며 다른 날 대조선 독립에 성공한 부부가 되기를 희망함이니 그들의 희망을 가히 짐작하자.”는 것이라 하였다. 이 사설은 몇 몇 여자들이 하와이에 오는 동안 희망에 가득차서 개사하여 불렀다는 찬송가 257 장 (현 한영찬송가 228장) <저 좋은 낙원 이르니>의 가사도 실었다. 큰 꿈을 안고 도착한 사진신부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현실에 부딪혔다. 농장 노동자의 월급이 그리 많은 것이 아니었고, 혹은 사탕수수농장을 떠난 남편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란 그리 많지 않아 수입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때문에 사진신부들은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고, 강한 집념으로 가정을 꾸려나갔다. 그러면서 사진신부들은, 한국에서 교회에 다니지 않았더라도 일요일에는 친구들도 만나고 세상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교회에 출석하였다. 대부분의 사탕수수농장에 한인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교회 출석이 가능했다. 교회 모임을 통해 친해진 사진신부들은 서로 도왔고 또 기존의 여성단체에 속하여 활동했다. 사진신부 도착 이전에 이미 한인여성들이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신명부인회(1908년 경 설립)와 부인교육회 (1909년 4월 결성)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두 단체가 호놀룰루에 본부를 두고 다른 섬에 지부까지 두고 있었다. 새 신부들의 도착으로 이들 단체활동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1913년 4월에 기존의 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부인회를 조직하였다. 창립 당시 70명 회원은 자녀의 국어장려, 일본제품배척, 교회와 사회단체 후원, 그리고 재난동포 구제를 대한부인회의 목적으로 삼았다. 이들은 회비에 의존하여 활동하는 소극적인 수단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회원들이 군복을 만들어 파는 등 실업을 통하여 재정을 확충하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활동경비를 마련하였다. 그동안 하와이에 조직된 어떤 단체들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법이었다. 이렇게 마련한 기금 중 $300을 1914년 5월에 주한 미국 감리교선교사 노불(William Arthur Noble 盧普乙)을 통하여 서간도 재난동포에게 보냈고, 1918년 6월에는 $250을 호놀룰루에서 목회하다 귀국한 김유순 목사에게 보내 황해도에 논을 매입하도록 하였다. 이 땅에서 추수한 쌀을 팔아 한국 내 기독교 전도를 돕고자 했다. 미국 선교사의 도움이 있었기에 하와이 이민이 시작되었는데, 10년 후 하와이 한인들이 모국의 전도사업, 모국선교를 위해 기금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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