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군수를 지내셨으며 그 이전엔 면장, 금융조합장, 연초경작조합장 등 7개의 조직을 관장하셨던 나의 선친의 마지막 직함은 수리조합장이셨다. 1953년 한국전 종전 무렵 위락시설이 거의 전무하던 시설 청주에 주둔하던 주한군사원조사절단(KMAG) 소속 미군 장교들에게는 진천의 사이폰식 저수지에서의 낚시질 정도가 최고의 휴식이었던 모양이다. 그중 하나가 교육담당 밋트맨 대위였었다.
그가 인사차 수리조합장실에 들렀을 때 선친께서는 당시 청주중학교 2학년생이었던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는데 흔쾌히 화답을 했단다. 아직도 나는 그를 KMAG의 숙사로 방문했던 첫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밋트맨 대위의 친구도 잠깐 동석했는데 그 친구가 나에게 담배를 권하길래 “담배를 못 피운다”(I can’t smoke)라고 했더니 그 말이 틀렸다고 교정해 준 생각이 난다. 사람들은 다 담배를 피울 수 있지만 피우지 않기 때문에 “담배를 못 피운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담배를 안 피운다”(I do not smoke)라고 해야 정확하다는 지적이었다.
내 아내도 그 같은 미국 문화와 한국 문화의 차이를 실감한 적이 있다. 1964년 11월에 아내는 9월부터 이미 스탠포드 대학에 와있던 나와 합류하기 위해 미국엘 오게 된다. 당시 국제 전화도 어려웠던 시절이라 전보로 LA에 있는 고종 사촌오빠에게 마중 나오라는 연락을 했지만 배달사고였던지 LA 공항에 내린 아내는 오빠가 안 나와서 크게 당황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트래블 에이드의 도움으로 나에게 전화를 하고 그날 밤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는 연락이 와서 자동차도 없던 나로서는 홈스테이 하던 노박 변호사 부부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부와 함께 아내를 픽업했을 때는 밤 열두시 경이었는데 우선 그 집으로 가서 그 부인이 데워준 치킨 누들 수프를 먹게 되었다. 오빠 집에 갈 것으로 예상해서 쫄쫄 굶었던 아내에게 미세스 노박이 또 한 그릇 먹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No”하고 대답하자 그는 대뜸 식탁을 치우는 게 아닌가. 두어 번 더 권할 줄로 생각하고 그랬었는데 고픈 배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던 것이 상당히 억울했던지 몇 십년 후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아내는 그 얘기를 하면서 “동양 사람들에게는 두서너 번 더 권해야 합니다”라고 해서 웃은 적이 있다.
당시 스탠포드 신문학과에는 세계적인 저명학자 윌버 슈람 박사가 있었다. 하루는 그를 만나러 교수실에 갔더니 “무엇을 해드릴까요”(What can I do for you?)라고 해서 나의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는 그 말이 “빨리 빨리 용건만 말하고 꺼져버려라”는 뜻으로 들렸던 것은 당시 한국식으로 만나면 날씨나 가족 이야기로 처음 대화 부분을 채우던 문화 습관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먹서먹해진 슈람 교수와는 퍼스트 네임이 아니라 공식적 경칭만 사용하는 관계였을 뿐이다. 미국에 50년을 살았으면서도 퍼스트 네임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들은 구제불능의 완고성 노예들인 것 같다. 우리에게는 허그(Hug)도 마찬가지니까 고루한 구식인간들이다. 그래서 손해도 많았다. 슈람 교수가 친했던 외국 제자들에게는 유네스코 등 좋은 자리에 천거했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도 나의 미국 문화 적응이 부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했던 문화의 차이를 하나만 더 들어보면 ‘work’란 단어가 있다. 아내가 직장엘 다니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는 일하고 있다”(She is working)라고 하는 대신 ”그녀가 사무실에 있다“(She is at her office)”라는 어색한 표현을 오랫동안 고집해왔었다. 사농공상의 양반시절 손으로 일하는 것은 천업이고 머리로 일하는 것과는 구별된다는 구태의연한 관습의 굴레에서 해방이 안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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