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실베이니아의 시골동네 리티츠 근처에 20년 전통의 무인 노점상이 있다. 봄엔 아스파라거스, 여름엔 옥수수, 추수감사절 무렵의 가을엔 호박이 주로 가판대를 장식한다. 지나는 길손들이 차를 멈추고 농작물을 산 뒤 대금을 투표함처럼 생긴 박스에 넣는다. 거스름용 잔돈은 자물쇠가 달리지 않은 작은 통에 따로 마련해 놨다. 그 옆에 계산기도 하나 챙겨뒀다.
노점상 주인인 농부 데니스 헤스(62)는 손님들이 대부분 지역주민이고 간혹 여행객도 있지만 99.5%가 정직하다고 말한다. 필라델피아나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온 여행객들은 이런 무인상점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고 했다. 하지만 헤스도 사악해져가는 세태 속에 비양심적 손님비율이 0.5%를 초과할지 모른다며 최근 가판대에 방범 카메라를 달았다.
헤스와 달리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남을 잘 믿지 않는다. AP통신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상점에서 물건을 산 뒤 크레딧카드를 점원에게 넘겨줄 때, 좁은 길을 운전하고 가다가 맞은편에오는 다른 운전자를 만날 때, 비행기 안에서 전혀 낯선 사람과 나란히 앉을 때 각각 상대편 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응답자는 3분의1도 채 안됐다.
지난 1972년 처음 실시된 전국 사회조사(GSS)에선 응답자의 절반이 다른 사람들을 대체로 신뢰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실시된 이번 AP조사에서는 남을 대할 때 “주의하면 할수록 좋다”는 응답자가 3분의2를 웃돌았다.
‘나 홀로 볼링’의 저자인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전성기를 누렸던 ‘사회 유대형 세대’와 달리 요즘 미국인들은 동네 볼링 경기나 사슴사냥 파티에 함께 몰려다니지 않고 대부분 방구석에서 TV나 시청하기 때문에 사교모임과 커뮤니티 활동이 줄어들었고, 결과적으로 모르는 사람을 불신하는 풍조가 늘어났다고 설명한다.
매릴랜드 대학의 에릭 우슬라너 교수는 신뢰도 인심처럼 곳간에서 난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인들의 빈부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신뢰의 폭은 반대로 좁아졌다고 지적한다. 세상이 살기 좋고 앞으로 더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부자들은 남을 대체로 신뢰하지만 반대로 저항할 수 없는 어떤 세력에 눌려 있다고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불신자라는 얘기다.
특히 흑인들의 불신풍조가 높다. 지난 2012년 시카고 대학 설문조사에서 흑인 응답자 10명 중 8명은 “남을 대할 때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불신 비율은 1972년 이후 25차례 이어진 GSS에서 그대로 유지돼왔다. 최근 퍼거슨 사태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잇달아 발생한 백인경관의 흑인 총격사건으로 흑인사회의 불신비율이 더 높아졌을 터다.
한국에선 운전자들이 서로 불신한다. 교통위반 사진을 전화기로 찍어 고자질하기 일쑤다. ‘갑질’이라는 괴상한 말도 생겼다. 소위 ‘땅콩회항’이 대표적 예이다. 박근혜 정부 신뢰도는 30%도 안 된다. 얼마전 턱걸이로 국회인준을 받은 이완구 총리를 포함한 저간의 모든 총리후보들은 대한민국 지도자급 인사 중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 재확인시켰다.
미주 한인들은 상황이 훨씬 좋다. 미국정부를 신뢰하고, 정부로부터도 두터운 신뢰를 받는다. 요즘 세금보고 시즌이 바로 그 신뢰를 확인하는 때이다. 모든 국민이 지난 한해 동안 번 수입을 스스로 계산해서 보고한 후 덜 낸 세금은 더 내고, 많이 낸 세금은 돌려받는다. 헤스의 무인 노점상처럼 상호 신뢰를 전제로 하는 양심 시험장이다. 감시 카메라도 없다.
한인들의 신뢰성은 이미 입증됐다. 시애틀 한국일보의 연례 불우이웃 돕기 모금에 역대 최고액인 6만5,700달러가 기탁됐다. 물론 동포애의 발로이지만 성금이 한 푼 낭비 없이 확인된 불우이웃들에게 전달된다는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성금은 얼마 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정된 50여 불우 동포에게 분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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