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스버그는 남북전쟁으로, 델타는 가난으로 유명세
▶ 빅스버그,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최후의 방어선
전쟁기념관에서 당시 남군 복장과 실상
남북전쟁 당시 남군 사령관의 가마상
전쟁 끝나고 80년 넘도록 독립기념일 경축안해
미시시피 델타, 빈곤지수 미 평균 3배 넘을 정도
흑인들 농장노예에서 소작농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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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럼없이 안방(Master Bedroom)을 내어주는 친구 부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에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화려한 장식 없이 단촐 하게 꾸며진 친구의 방과 잘 정돈된 넓은 뒤뜰에 조그만 텃밭은, 현실과 타협안하고 학자답게 깨끗이 살아온 그의 모든 삶이 배어있어, 복잡하게 속세에 젖어있는 우리 생활과 비교되어 부끄러운 마음마저 갖게 한다.
밤늦게까지 와인을 마시며 우리들만의 어렸을 적 무용담(?)은 물론, 미시시피 주와 빅스버그의 역사, 그리고 현재 이 지역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깊이 있는 그의 의견을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미시시피 주의 주도(Capital) 잭슨(Jackson)은 가끔 들어서 알았지만 빅스버그에 대해선 막연히 친구가 살고 있는 그저 조그만 도시이려니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깊은 애환이 서려있는 도시 인줄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빅스버그는 미시시피 삼각주(Mississippi Delta) 북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 도시를 지나지 않으면 미시시피 강을 통해 멕시코 만을 거쳐 대서양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고, 대도시 뉴 올린스와 세인트 루이스 사이 한가운데 위치하여 보급로로 중요했기 때문에 남북전쟁 승패의 Key Point이었다 한다. 도시를 둘러보니, 빅스버그 시는 방어에 유리한 천혜의 자연조건과 진지구축으로 인해 공략하기가 어려운 도시였다.
미시시피강을 끼고 편자 모양의 굽이를 내려다보는 높은 절벽에 도시가 있어 선박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했고 도보로도 다니기 힘든 늪지대까지 펼쳐져 있어서 북군의 그 유명한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Grant) 장군이 몇 번씩이나 점령에 실패했던 곳이다.
그랜트 장군은 빅스버그에서 예상 밖의 저항을 받게 되자 마침내 1863년 5/18일부터 7/4일까지 47일 동안 빅스버그를 포위하였고 포위된 남군과 빅스버그 시민들은 이때에 잊을 수 없는 치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전쟁은 언제나 잔인한 것 - 특히 패배자에게는 - 전쟁이 끝난 후 오랫동안 빅스버그 사람들은 그 패배의 쓰라린 기억을 잊기 어려워 그 후부터 80년이 훌쩍 넘어선 1945년까지도 자기들이 항복한 7월4일을 독립 기념일로 경축하지 않았다고 한다.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전쟁 기념관을 나와 Hwy 61을 타고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초록의 대 평야가 펼쳐지는데 이곳이 바로 유명한 미시시피 델타(Mississippi Delta)이다. 빅스버그는 남북전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미시시피 델타는 다른 이유로 더 유명해져 있다.
빈곤(Poverty), 가난이 바로 이 델타 지역을 유명하게 만든 첫 번째 이유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미국 전체의 빈곤지수가 약15%인데, 미시시피 주가 22%, 이곳 델타지역은 40~50%, 전국 평균의 3배가 넘는 수치라 하니 이곳의 가난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왜 이렇게 가난하게 되었는지 역사적 배경을 조금만 들춰보면 알 수가 있다.
미시시피 델타는 남쪽으로는 빅스버그에서 북쪽으로는 거의 멤피스(Memphis)까지 약 200마일, 동서로는 약 50마일에 걸쳐있는 미시시피 강 유역을 말한다. 이곳 델타는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강 하구의 삼각주와는 의미가 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수천 년 동안 강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내려오던 흙, 모래(Sediments)가 강이 홍수로 범람할 때마다 강 옆으로 평평하게 쌓여진 지역을 말한다. 영어로 표현하면 Alluvial Deposit(충적토 층)으로 된 평야(Plain)이다. 토목공학을 전공한 친구답게 전문용어를 섞은 그의 열강은 끝내 나로 하여금 노트를 꺼내 메모를 하게 만든다. ㅎㅎㅎ그래서 이곳의 흙은 자연적으로 유기물질(Organic Material)이 많고 비옥(Fertile)해서 농사 특히 목화 재배에 좋다고 하며 한국에도 규모는 작지만 한강, 낙동강, 섬진강 지역에 있다 한다.
델타는 남북전쟁 전에는 목화농장으로 가장 유명한 곳으로 부자 농장주인들이 많았기에 흑인 노예들이 많았던 곳이다. 전쟁이 끝난 후 이곳의 많은 흑인들이 토지를 소유하는 지주가 되었으나 1900년대 초기 지속적인 목화 값 하락으로 결국에는 다시 토지를 팔고 소작농이 되었다.
그러니까 흑인들은 농장노예에서 소작농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들의 경제적 노예생활 즉 다시 말해 흑인들은 저임금 농장 노동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델타지역 농사가 기계화되고 기업화되면서 1920년대 특히 1930년대 대공황 때 많은 사람들이 델타를 떠나 중서부 대도시로 떠났으나 아직도 이곳은 흑인들이 60~70%를 차지하고 있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거의 130년, 그리고 1960년대 민권운동이 시작 된지 60년, 하지만 이 지역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친구는 힘주어 말한다. 영양실조가 고도 비만으로 바뀌고 미혼 10대들의 임신문제가 미국에서 1위를 차지하고 마약, 알코올문제는 더욱 심각해졌을 뿐…물론 흑인들이 옛날에 받았던 눈에 띄는 인종차별의 문제는 사라졌지만 근본적인 문제 즉 이 지역의 고통스러웠던 과거에서 시작된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 한다.
백인주도의 정치세계에서는 흑인들을 위한 실제 정책보다는 문화적 이슈(종교, 동성애, 낙태 등)로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으로 이곳에서는 보수들의 흑백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남부 민주당원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미워했던 링컨의 공화당원으로 변신하였다 한다.
이처럼 Deep South(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알라바마, 알칸소 지역)에서의 흑백문제는 오늘도 여전히 중요한 이슈 그리고 델타의 빈곤문제는 내일도 여전히 계속될 거라는 것이 지식인들의 견해다. 이 친구는 분명 미시시피를 사랑한다, 아니 미국을 사랑한다. 그러기에 사랑의 눈으로 미국을 바라보며 날카로운 비판과 끊임없는 관심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글∙사진성기왕통신원>
숙명
-장금자
쿤타킨테 후예로 태어난 죄
살갗을 태워 옥수수 익히네
짐승이 되어야만 살수 있는 곳
어머니는 서쪽동생은 남쪽으로
얼마인지도 모르고 팔려 나가네
웃는게 무엇인지
배 부른게 무엇인지
나는 모르네
목놓아 울어보는 것은
사치이란 걸 알고는
옥수수 밭에서
가슴을 저며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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