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일보 하와이 창간 43주년 보훈의 달 특별기획
글쓴이/사진제공 : 스탠리 후지이, 번역 : 손수현, 유미영
한국일보 하와이 창간 43주년,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본보는 한국전참전용사 스텐리 후지이 옹의 한국전 참전용사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수필은 주 호놀룰루 총영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재기발랄한 공관원들이 의기 투합해 번역을 했다. 이들은 업무의 연장선이 아닌 자원봉사로 이 작업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전쟁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 뜨고 그 실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번역 후기를 본보 4월14일자 기사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지금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직시하고 한국전참전용사 할아버지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지켜 낸 자유의 가치는 무엇인지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본다.
<편집자주>
내 이름은 ‘스탠리 후지이’로 나는 하와이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이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참전용사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 쓴 편지를 엮은 책 ‘영웅들에게’를 읽고 남한이 북한 인민군들에게 침략당하고 유엔군의 도움으로 민주주의를 되찾기까지 참전용사들이 희생하고 헌신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나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주고자 합니다.
나는 유엔군 소속 미 육군으로서 38선을 넘어온 북쪽의 적군들에 맞서 싸웠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사실 전쟁의 피해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투 후 가옥과 마을이 많이 파괴되었고 남녀노소 모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미군 트럭이 지나가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은 음식을 구걸했고, 트럭에 타고 있던 우리 군인들은 가지고 있던 사탕과 쿠키들을 몽땅 던져주곤 했습니다. 평화로웠던 삶에 찾아온 혼란과 슬픔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고, 공산주의 침략군과 맞서 싸우고자 하는 결심을 더욱 단단히 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수천 개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이 조금이나마 우리가 한국전쟁에서 무엇을 했는지 배울 수 있길 바랍니다. <나의 이야기>나는 1930년 하와이에서 태어나 오아후 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나는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는 호놀룰루 빈민가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다세대 건물의 작은 양복점에서 일하셨고, 우리 가족은 그 건물 바로 뒤에서 살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어느 날, 어떤 남자분이 양복점에 들러 한국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러 간다며 옷을 한 벌 맞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내가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하와이에서 멀리 떨어진 아시아에 있는 나라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내가 한국전에 참전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내 꿈은 하와이를 떠나서 본토로 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새로운 환경과 낯선 이들 속에서 홀로 선다는 것은 큰 도전이었지만 미래를 잘 개척해 보자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대학교 2학년 스무 살이었는데, 간접적으로 한국전쟁을 접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학시절 나는 밴드 동아리에서 활동했었는데, 우리 동아리는 동네 병원에 위문공연을 가곤 했습니다. 동아리에서 나는 하와이 노래를 부르면서 우쿨렐레 연주를 했고, 여학생 한 명이 거기에 맞춰서 훌라 춤을 추었습니다. 우리 밴드에는 기타, 아코디언, 하모니카 등 다양한 연주가와 탭 댄서, 마술사도 있었습니다. 병원에는 한국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 달에 두 번씩 위문공연을 했는데, 내 또래의 어린 군인들이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감동을 받곤 했었습니다.
1951년 여름방학, 하와이로 돌아온 지 얼마 안돼 미 국방부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미 육군으로 징집되었으니 호놀룰루 외곽에 있는 육군기지로 입대하여 보병훈련을 받으라는 내용의 통지서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다른 대학 친구들도 많이 징집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 16주간의 집중적인 군사훈련을 마친 후 나는 자유 수호라는 임명을 받고 유엔군 소속 보병 일병으로 한국에 파병되었습니다. 한국으로 가던 날, 우리 가족들은 수송선을 타고 출발하는 나를 배웅하러 호놀룰루 항구에 나왔습니다.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혹시나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몹시 슬펐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늘 가족의 장남인 나를 존중해주셨고 무엇을 하든 잘 하고 나머지 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달린 알록달록 화려한 천으로 만든 허리띠를 나에게 주시며 이 허리띠가 나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줄 거라고 하셨습니다. 직접 공들여 만들어 주신 허리띠를 보고 어머니께서 쏟으신 큰 사랑과 정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보물과도 같은 허리띠를 소중히 간직했고, 이 허리띠가 나를 안전하게 귀향시켜 줄 거라는 기적을 믿었습니다. 떠나는 나에게 어머니께서는 조국을 위해 한국에서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들으니 용기가 샘솟았습니다. 그날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수송선은 한국으로 향하기 전에 일본에 먼저 들렀고, 거기에서 우리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역사, 문화, 사람들, 전투기지의 위생상태, 산지에서의 전투법, 포로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우물물을 마시면 설사를 할 수도 있다는 것, 한국의 날씨, 그 동안의 전투내용 등 여러 가지를 배우고 나는 한국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난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 앞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항해는 별일 없이 순탄했는데 서해에 들어서면서 태풍을 만났습니다. 바닷물이 크게 일렁이고 거센 파도가 배를 세차게 내리쳤습니다. 태풍 때문에 뱃멀미가 난 나는 갑판을 휘청거리면서 걸어 다녔고 양 다리는 힘이 풀려 후들거리는 상황에서 배 밖으로 휩쓸려가지 않도록 난간을 꼭 잡아야 했습니다. 속이 너무 메스꺼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납게 날뛰는 바다 가운데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렸고, 인천항으로 향하는 여정은 그렇게 계속되었습니다. 육지를 다시 보니 어둠을 빠져 나와 빛을 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배에서 내리는 게 너무 좋아서 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땅에 뽀뽀를 해 댔습니다. 딱딱한 땅 위를 걸으니 곧 기분도 좋아졌고 멀미도 사라졌습니다. 나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전쟁에 대한 사기가 높아졌습니다. 1952년 1월 인천의 항구는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탄약, 트럭, 탱크, 폭탄 등을 하역하느라 바빴습니다. 나는 새로 도착한 군인들 무리에 합류하여 부대로 가는 트럭에 올랐습니다.
나는 서울 북쪽 금화산 초원계곡에 산지 한 자락을 점유하고 있던 7연대 3사단에 보병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그곳에서 2대대 C중대로 보내졌는데 이 중대는 많은 대원들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또는 운이 좋아 1년 복무를 마치고 귀환해서 병력이 부족한 상태였었습니다. 해질녘 즈음 내가 탄 수송트럭은 높은 산들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부대에 도착했습니다.
한 병사가 나와서 트럭에 있는 무리 중 나와 두 명의 신병을 맞이했고, 우리를 나무가 거의 없는 산등성이로 안내했습니다. 소총과 탄약을 비롯해 모든 소지품이 들어있는 무거운 군장을 지고 산을 오르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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