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일보 하와이 창간 43주년 보훈의 달 특별기획
글쓴이/사진 제공 : 스탠리 후지이 , 번역 : 손수현, 유미영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마지막 달에는 시간이 정말 느리게 갔고 나는 죽거나 부상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1953년 2월의 어느 춥고 바람 불던 아침, 전쟁이 끝났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울했던 기분은 순식간에 흥분으로 바뀌었고 내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차 올랐습니다. 나는 이 전쟁에서 운 좋게도 살아남게 해주신 하느님께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숙소를 떠날 때 몇몇의 군인들이 작별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그 중에는 이택오라는 이름의 한국 군인도 있었습니다. 그는 영어를 잘 못했지만 우리는 부족한 영어와 간단한 손짓으로 쉽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의 꿈은 전쟁이 끝나면 교육을 받고 사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좋은 친구였고 나는 그에게 이별의 선물로 손목시계를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값진 선물을 받는 것은 처음이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택오는 공항 행 트럭이 대기하고 있던 산 아래까지 내 무거운 배낭과 소총을 대신 짊어지고 내려가 배웅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채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슬펐지만 그가 꼭 전쟁에서 살아남아 꿈을 이루기를 기도했습니다.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황량한 전투터를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전쟁이 지속되어 다시 돌아오게 되지는 않을까..... 일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탑승한 기쁨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고, 나는 도쿄까지 들뜬 마음으로 날아갔습니다. 캠프 드레이크 기지에서 샤워도 하고 새 군복으로 갈아입고 나니 진정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습니다. 며칠간 휴식을 취하고 원기를 회복한 나는 다른 병사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요코하마에 가서 하와이로 돌아가는 수송선에 올랐습니다. 무거운 장비들과 무기, 대포, 전쟁에 필요한 물품들로 가득 찬 배에서 승객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10일간의 긴 여정 동안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갑판 위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보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더 빨리 집에 가지 못하는 게 실망스러웠지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너무 행복했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일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지만 단 시간 만에 중사로 진급했습니다. 승진으로 인해 나는 서른여섯 명의 병사들과 이들의 복지를 책임지는 소대장이 되었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한 달 전, 현지임관 을 통해 장교로 진급하는 것은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나는 만일 그 제안을 수락하면 인생이 또 어떻게 달라질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으나 과감히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대학에 돌아가 민간인으로서 커리어를 쌓고 싶었는데 장교가 되면 전쟁터에 얼마나 더 있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수송선이 하와이에 도착하여 항구로 들어설 때, 나는 다른 병사들과 함께 난간에 붙어서 평화로운 호놀룰루의 풍경과 와이키키 스카이라인 옆으로 우뚝 선 다이아몬드 헤드의 경치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배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환성과 고함소리, 화려한 로얄 하와이안 밴드의 연주에 맞추어 나뭇잎 치마를 입고 훌라춤을 추는 소녀들의 모습으로 항구는 활기를 띄고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파송되던 때 나는 이러한 환영식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내 목에 환영의 레이를 걸어 주었습니다. 더없이 행복하고 감동적인 재회였으며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향에 돌아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귀향한 후 5개월이 지난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은 휴전협정으로 끝이 났습니다. 제대를 기다리면서 나는 한국전에 참전했던 동료들을 자주 만나 한국에서의 경험, 비극적인 사건들과 외로움, 희생 그리고 전쟁의 잔인함에 대하여 이야기 하곤 하였는데 다른 참전용사 들과 함께 이러한 감정들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치유를 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 불편한 기억이 떠오를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내 잠재의식 속 깊은 한 구석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총성이 울리고 포탄이 터지며 조명탄, 총알, 파편이 날라 다니고, 시체들이 나뒹구는 악몽에 소리를 지르면서 깨곤 했습니다. 다행히도 악몽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인가 끔찍한 꿈 때문에 깨지 않고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은 20세기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으로 기록되는데, 미군 3만 7천명을 포함해 2백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고 10만 명의 어린이들이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과 의사, 간호사들에게 이 전쟁은 절대로 ‘잊혀진 전쟁’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전쟁도 잊혀질 수는 없습니다. ‘잊혀진 전쟁’ 이란 표현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인과 민간인, 가족들의 큰 희생을 매정하게 무시하는 표현입니다. 나는 육군에서 제대한 후 결혼을 하고 딸 넷을 낳아 기르면서 인생의 여정을 계속했습니다. 한국은 나의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갔지만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고 한국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삶을 되찾아 준 청년기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은 내 인생의 일부가 되었지만 난 단 한 번도 한국에 다시 가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2010년 한국정부의 보은사업에 초청되어 다른 참전용사들과 함께 한국을 다시 방문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본 한국의 마지막 모습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땅이었기에 나는 한국의 눈부신 발전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한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세계 일류 산업 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전쟁 중에 죽어간 수천 명의 연합군 병사들은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기에 평화롭게 잠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하고, 대한민국 재건의 발판을 마련하고 한국의 자유를 되찾아준 참전용사들의 위대한 전설의 일부가 될 수 있어 자랑스럽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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