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관계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폭력행위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어봐도 지금의 우리 사회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다만 문명이기들의 발달로 폭력행위는 더 다양하고 복잡해진 것뿐이다.
지난 8월 버지니아와 10월 초 오리건에서 발생했던 총기사고는 심한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정신질환 병력을 지닌 사람이 총기사고를 내면 세상은 떠들썩해지고, 정신과 의사들의 자세는 낮아만 진다. 직접 치료하지는 않았다 해도 같은 정신과의사로서 어느 정도 사회에 대한 죄의식도 느낀다. 일반인들과 사법 시스템은 정신과 의사를 무슨 용한 점쟁이처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는 모든 사람이 책임을 질 문제다. 국민이 뽑은 정치인(행정부와 입법부)들은 정신질환자의 대형 총기사고가 터지면 희생자와 그 가족들을 위해 잠깐 묵념하고, 며칠 간 국기를 반쯤 내려놓는 것으로 끝을 낸다. 미 총기협회의 정치인들에 대한 로비로 총기규제에 대한 근본적 대책은 미미할 뿐이다.
미국 대도시의 빈민가에서는 평균 매 15-20분마다 사람들이 총기로 죽어간다. 정신질환자의 총기사고가 점점 증가하는 경향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병동의 감소, 총기소유 규제의 허술함, 정신질환자에 대한 과도한 법적보호다. 정신분열증이나 양극성장애 등 심한 정신질환 환자를 치료해 줄 병동 수가 반세기 전만해도 거의 60만개였으나 지금은 고작 4만5,000개 정도다. 여기에 정신질환 경력자의 총기소유를 규제하는 정책이 너무 허술하여 신원조회에 걸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1960년대에 시작된 민권운동의 영향으로 정신질환자의 법적, 의료적 권리는 점점 커졌다. 치료자는 환자의 구두나 서면동의가 없으면 가장 가까운 배우자한테도 환자의 증상을 물을 수도 없고, 배우자가 증상의 정도와 진단명, 치료방법 과정 등을 물어 와도 말해 줄 수 없다.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면 많은 경우 생명과 재산을 구할 방법을 찾을 수 있지만 환자의 동의 없이는 이를 법으로 금하고 있기에 중증 케이스도 강제로 치료하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환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좋은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결과는 심한 정신질환자들이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해 병원대신 감옥에 갇히거나, 노숙자나 술?마약 중독자가 되거나, 신체질환이 겹쳐 보통사람들 보다 평균 25년 일찍 죽게 되는 등 정신질환자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오래 전에 만났던 환자 이야기다.
“이 서류에 서명 좀 해주세요.”양극성장애를 가졌으나 증상이 치유된 40대 중년남자의 요청이었다. 서류를 보니 정신질환 병력이 있는 사람이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지 정신과 의사의 전문적 견해를 묻는 것이었다. 정신과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물론 가끔 불가피하게 인간사회를 지켜야하는 수호자 노릇도 감당해야 된다. 정신과 의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이런 경우를 당할 때다.
“서명을 안 해주면 저는 옛 직업으로 돌아갈 수 없고 그러면 제 가족은 굶습니다.”
그는 법과 질서에 따라 시민을 지켜주는 직장에서 근무하다 잠시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였다. 가족병력이 있는 양극성장애가 업무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튀어나온 케이스였다. 양극성 장애는 재발이 잘되는 정신질환의 하나로 당장 증상이 없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만약 약물복용을 중단하면 재발 위험은 매우 커진다. 서명을 하자니 위험부담이 따르고 안하자니 그는 직업을 잃고 만다. 환자는 자신의 변호사 이야기를 꺼내며 넌지시 압박도 가해왔다. 의사들은 항상 방어적 의료행위만 할 수는 없다. 경우에 따라 환자의 안녕을 위해 위험부담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나는 그때 후자를 택했다.
미국립 정신기관에 의하면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치료를 받으면 받지 않은 경우보다 폭력행위는 15배나 줄고, 수감, 노숙 생활, 중독, 그리고 응급실 방문도 현저히 줄어든다. 그래서 미 정신의학협회는 엄격한 총기규제 정책의 시행, 현실 인식력이 떨어진 심한 정신질환자의 법적권리 축소 그리고 최소한의 정신과 병동 증설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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