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는 자신의 말을 물리지 않는 남자인줄 알았는데 제6대 본드인 대니얼 크레이그는 오리발을 내미는 남자였다. 그는 6일 개봉된 최신작 007시리즈 ‘스펙터’(Spectre) 촬영이 끝난 뒤 가진 한 인터뷰에서 “다시 본드 역을 맡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다시 본드를 하느니 차라리 유리를 깨 손목을 끊겠다”면서 본드와의 작별을 선언했었다.
나는 크레이그가 이런 극언을 했을 때 ‘자기를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주고 또 천문학적 숫자의 돈을 안겨준 본드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 저렇게 악에 받힌 소리를 하는가’하고 그의 인간성에 대해 회의를 했었다.
그런데 지난달 런던에서 만난 크레이그는 같은 물음에 대해 “지난 2년간 ‘스펙터’에 매달려 당분간 본드를 원치 않는다”면서 “그러나 앞일은 모르겠다”고 과거 자기가 한 말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스펙터’의 제작자와 감독과 배우들과의 인터뷰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원들이 묵은 템즈 강변의 로열 호스가즈 호텔 건너편의 코린티아 호텔에서 있었다. 샘 멘데스 감독과 함께 가진 인터뷰장에 입장한 크레이그는 마지못한 미소를 지으면서 질문에 짤막하게 대답을 했는데 달랑 20분짜리 인터뷰가 끝난 즉시 “와 줘서 고맙다”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가듯이 인터뷰장을 빠져나갔다.
소설 속의 본드는 비록 턱시도를 입고 다닐지는 모르지만 매우 무례하고 거칠고 사나우며 여자 알기를 신발털이 깔개 정도로 아는 남자로 인간성이 아주 고약한 사람이다. 나는 크레이그의 무례를 목격하면서 저 사람이 본드 노릇을 여러 번 하다보니 진짜로 본드 닮아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크레이그 본인도 자기가 한 말을 바꿨지만 007시리즈 제작권 소유자인 바바라 브로콜리도 “크레이그를 결코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으니 몇년 후 크레이그를 다시 본드로서 만날 가능성이 많다.
나는 브로콜리에게 최근 읽은 최신 본드소설 ‘트리거 모티스’를 영화로 만들 계획이냐고 물었다. 이에 브로콜리는 “나도 그 책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내용이 미소간 냉전시대의 얘기여서 현재를 시간대로 한 요즘 본드 얘기에 맞지 않아 영화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고 대답했다. 소설의 본드 빌런이 한국인인 신재성이어서 영화화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실망이다.
본드영화의 필수품인 ‘스펙터’의 두 명의 본드걸 중 먼저 역대 시리즈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본드걸이라 해서 화제가 된 이탈리아 배우 모니카 벨루치(51)를 만났다. 긴 브루넷 머리에 위풍당당하고 육감적인 몸과 입술과 눈을 비롯해 모든 것이 짙은 얼굴을 한 벨루치는 성형수술에 관한 질문에 대해 “젊음의 미가 사라지고 나이가 먹으면 내면의 미가 있다”고 대답했다. 자기 나이를 51세라고 서슴없이 밝히는 그녀는 요가와 수영으로 몸매를 유지한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본드걸은 프랑스 배우 레아 세이두. 조용한 소녀 같았는데 내가 “당신은 본드걸로 불리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가. 내가 듣기엔 마치 본드의 월터 PPK나 오메가시계처럼 그의 소유물 같이 들린다”고 물었다. 이에 세이두는 “난 그렇게 불리는 것에 상관 않는다”면서 “요즘 본드걸들은 시대변화로 옛날 본드걸들보다 강해졌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세이두는 월터 PPK가 본드가 애용하는 권총인줄을 몰라 내게 “월터 PPK”하고 되물었다. 본드걸로 나오는 여자가 사전준비가 부족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세이두는 본드영화에 나온 것은 꿈의 실현 이상이라면서 다시 본드영화에 나오고 싶다고 바랐다.
세이두는 본드의 상관 M의 여비서 모니페니 역의 네이오미 해리스와 함께 인터뷰를 했다. 내가 해리스에게 물었다. “옛날 본드영화의 모니페니는 본드를 진짜로 사랑했는데 당신은 본드를 욕망하지 않느냐.” 해리스는 이에 “나도 그를 몹시 원한다”고 대답하기에 내가 이번에는 “그런데 영화에서 보니 당신 애인이 있던데”라고 물었다. 이에 해리스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내가 본드를 기다리는 동안의 대용품”이라고 대답, 모두들 깔깔대고 웃었다.
본드영화에서 본드걸보다 더 중요한 본드 빌런인 ‘스펙터’의 두목 프란츠 오버하우저로 나온 여우처럼 생긴 오스트리아 배우 크리스토프 월츠는 생긴 것처럼 대답도 교활했다. 태도가 요사스럽고 말투가 사뭇 조롱조였는데 질문에도 미꾸라지 빠져나가는 듯이 대답했다. 크레이그와 함께 만나서 불쾌한 또 다른 인물이었다.
머무는 동안 런던은 깊은 가을답게 잿빛이었다. 인터뷰 후 시간이 나 템즈 강변을 산책했다. 강 좌우로 런던 아이와 빅벤이 얼굴을 내민 의사당이 요즘과 옛의 보기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런던에 갈 때면 자주 찾는 워털루브리지에 섰다. ‘애수’에서 비비안 리가 이 다리에서 달려오는 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던 장면이 생각났다.
내친 김에 ‘스펙터’의 대형 포스터가 걸린 원주형 건물(사진)을 돌아 비비안 리가 전선으로 떠나는 로버트 테일러를 전송하던 워털루 스테이션으로 발길을 옮겼다. 역 구내는 영화에서처럼 인파로 붐볐다. 여기 어디선가 리와 테일러가 재회의 포옹을 나누고 있으리라는 착각을 즐기면서 밤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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