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부에 관한한 40년 베테랑...아직도 열정 넘쳐
▶ 아이 키우며 할 수 있는 일 찾다 피부관리학원 등록. 자격증 취득
도미 후 맨하탄에 피부실 차리고
한인최초 전문 피부관리사로 활동
꾸준한 자기 계발.풍부한 경험
보유한 라이선스 수두룩
“일.사람 그리워 70넘어 다시 복귀”
피부 관리 분야에서 40여년 외길 인생을 걷고 있는 한인 여성이 있다. 그는 한인 스킨케어 업계의 선구자로 불린다. 뉴욕 한인 최초의 피부 관린 전문센터 원장도 역임했다. 한인사회에서 ‘건강한 피부 홍보대사’로 통한다. 그는 피부 전문가이다. 화려한 경력과 풍부한 경험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피부 관리 분야의 최고 베테랑인 조경자(72) 원장이다.
■피부 관리사의 인연
그는 고향인 전라북도 전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초, 중, 고교를 다닐 땐 각종 백일장에서 글짓기 상을 독차지 했다. 글재주가 뛰어난 문학소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넉넉하지 않은 2남2녀의 둘째딸로 태어나, 장래희망은 백의의 천사인 간호사. 하지만 간호공부와 인연이 안 닿아 우체국 공무원에 취직했다. 그리고 8-9년 정도 공무원 생활에 충실했다. 그 결과 모범공무원에게 주어지는 공무원장관상을 수상했다.
그러다 1969년 3살 연상의 남편과 중매로 결혼을 하고는 고향을 떠나게 된다. 서울 중곡동으로 이주해 신혼살림을 차렸기 때문이다. 결혼 후 1970년과 1972년에 각각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그 때부터 어린자녀들을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직업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여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피부 미용에 관심을 갖게 됐다. 바로 피부 관리학원에 등록했다. 그 때가 1975년. 지금으로부터 딱 40년 전에 피부 미용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학원공부로 피부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개인지도로 전문지식과 각종 테크닉도 배웠다. 홀로서기에 나설 때까지 무려 3년 동안이나 배우고 또 배웠다.
완벽주의자인 그의 성격 탓이었다. 그는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의 수련을 거친 후에야 1인 출장시스템에 돌입했다. 가정에서 어린자녀들을 돌봐야 했기에 미용실에서 전화예약 손님에 한 해 피부 관리를 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실력과 믿음에 대한 입소문으로 가정집 방문도 점점 늘었다. 고객은 대부분이 여자대학 학생이나 졸업생들이었다. 그는 그 때부터 이미 피부 관리 전문센터 창업을 준비하면서 풍부한 경험을 축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그가 한국을 떠나 1984년 맨하탄 32가에 ‘얼굴방 피부실’를 차리고, 한인 최초의 전문 피부관리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7년간 주7일
그는 1984년 ‘얼굴방 피부실’의 원장으로 한인사회에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한인 최초의 피부관리사로 등장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점, 기미, 주근깨 등의 잡티제거와 아이라인, 눈썹, 입술라인 등의 아이타투에 이르기까지 얼굴피부에 관한한 전문가로서 활동한다. 그 후 2년 동안 맨하탄에서 피부 미용실을 운영하다가 1986년 퀸즈 플러싱에 ‘한독피부센터’를 창업했다. 개업을 하자 많은 한인 고객들이 밀려들었다.
낯선 이국땅의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짬을 내 피부센터를 찾은 한인들은 점점 늘었다. 그는 찾아오는 고객들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야 했다. 그 당시 한독피부전문센터에서는 스킨케어 전문가 3명과 함께 스킨케어 실, 점 제거 실, 아이타투 실 등 첨단시설을 확보하고 부드럽고 깨끗한 최상의 피부유지를 할 수 있도록 관리를 해주는 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바빴는지는 7년 동안 주 7일을 쉬지 않고 일만 했던 것에서 엿볼 수 있다.
■명실상부 최고 베테랑
그가 피부 관리 분야의 최고 실력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꾸준한 배움에 있다. 피부관리사 자격증 취득을 기본이고 피부 관리전문센터를 운영하면서도 관련분야의 연구와 실력 쌓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배우고 전문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가 갖고 있는 관련 학위도 여럿이다. 한국과 뉴욕 주에서 라이선스를 취득한 그는 수지압 라이선스와 뉴욕주 아이타투 라이선스도 획득했다. 스위스와 독일에서는 필링 정통코스를 수료했다.
미국, 프랑스, 인터내셔널 스킨케어 스쿨에서는 각각 디플로마도 획득했다. 그뿐만 아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화학적 필링 디플로마도 각각 획득했다. 그는 꾸준한 자기 계발을 통해 화려한 경력과 풍부한 경험을 쌓았기에 피부 관리 분야의 명실상부한 최고의 베테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삶
그는 2007년 정기검진에서 유방암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초기 암이었다. 2차례 수술을 했다. 항암과 방사선 치료도 각각 8차례와 34차례나 받았다. 그렇게 3년 동안 암 치료를 잘 함으로써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치료과정에서 직원에게 가게를 넘겨야 했다. 한 때는 그가 암으로 죽었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었다.
미디어를 통해 살아있음을 알림으로써 다행히 소문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다시 그의 건강에 적신호가 찾아왔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2년 6개월 동안 심장, 허리디스크 그리고 무릎수술까지 무려 3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다보니 살은 빠지고 마음은 약해졌다. 병치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우울증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결심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 내가 좋아서 했던 일, 그리고 하면 기분 좋은 일인 피부관리사의 일을 다시 하기로 했다.
단골고객과 자신의 직업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3년 플러싱 150 Pl에 ‘조경자 원장’ 피부 관리실을 마련하고, 새로운 삶에 나섰다. 옛 고객들을 위주로 전화예약에 한 해 하루 5시간 정도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실, 확실, 진실’그는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완전히 끝날 때까지 확실하게 피부 관리를 해준다. 점, 검버섯, 주근깨, 사마귀 등의 잡티도 통증과 흉터 없이 완벽하게 제거한다. 타투는 눈썹, 입술라인, 아이라인 등을 예쁘고 자연스럽게 시술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몰라볼 정도로 해 준다. 물론, 오래됐거나 잘못된 타부의 칼라와 모양도 자연스러운 색상으로 수정해 준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고 즐기면서도 성실하게 임한다. 그래서 손님 한 명이라도 섭섭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마무리 한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피부 관리에 대한 실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 어느 종류, 어떤 상황의 피부 문제라도 확실하게 해 줄 수 있는 이유다. 그는 언제나 고객을 가족처럼 진실하게 대한다. 그런 노력으로 지금 찾아오는 고객의 80%가 단골고객이다.
한인사회에서 30년 이상 경력의 피부전문가라 단골고객의 대부분은 중장년층 이상이다. 뿐만 아니라 건강 때문에 몇 년 동안의 공백이 있었지만 워싱턴, 보스턴, 버지니아, 조지아 등 타주에서 찾아오는 고객들도 여전하다. 결국 그가 최선을 다하는 삶속에서 ‘성실, 확실, 진실’ 등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객들의 예뻐진 얼굴을 보면서 피부관리사란 직업에 매력을 느낀다. 지금까지 40년 외길인생을 걷고 있지만 다는 일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만큼 피부 미용은 나의 천직이다”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피부관리사를 예쁘게 해주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그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고와 보이는 피부를 지닌 비결에 대해 “얼굴에 맞는 로션과 스킨만 사용하며 항상 청결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귀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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