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느 해 연말에 옛 사우가 불쑥 회사로 찾아와 직원들에게 저녁을 ‘쐈다.’ 레스토랑에서 고급 와인이 곁들인 풀코스 디너를 마친 뒤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한 곡조씩 뽑았다. 그 옛 사우는 돈을 좀 벌고 보니 여전히 쪼들리고 있을 신문사의 옛 동료들이 생각났다고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비즈니스를 차려 손이 커진 그를 직원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연말엔 ‘큰 손’들이 많이 나타난다. 추수감사절에서 크리스마스를 거쳐 신년으로 이어지면서 사람들 마음이 따뜻해지고 여유로워지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긴다. 거리에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하는 것도 이 무렵이고, 사회단체들이 구제모금 캠페인을 벌이는 것도 이 무렵이다. 한국일보 시애틀지사도 지난주부터 연말연시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모으고 있다.
지난 2일 ‘수퍼 큰손’이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페이스북(SNS)의 창립자 겸 CEO인 마크 저커버그(31)가 450억달러를 웃도는 그의 전 재산 중 99%를 죽기 전까지 자선사업에 쓰겠다고 부인 프리실라 챈(30)과 함께 선언했다. 세계최고 갑부인 빌 게이츠를 능가하는 기부율이다. 게이츠 부부는 자기들 전 재산의 95%를 자선사업에 쓰겠다고 발표했었다.
유대계이며 게이츠처럼 하버드대학 중태생인 저커버그는 지난주 태어난 첫딸 ‘맥스’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부부공동 발표문에서 재산 99% 사회환원 결정은 “맥스와 그의 세대가 부모세대보다 더 좋은 세상에 살게 해주기 위한 것”이라며 지금까지 도와온 지구촌 질병치료, 개인별 맞춤교육, 지역사회 발전 등의 분야를 계속 중점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저커버그는 23세였던 2007년 억만장자가 됐고 2010년 타임지에 의해 세계 100대 부자 및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명단에 끼었다. 같은 해 그를 모델로 제작된 영화 ‘소셜 네트워크’가 크게 히트했다. 중국계 소아과의사인 챈과 2012년 결혼했다. 페이스북의 CEO이지만 연봉이 고작 1센트인 그는 평생 자선사업에 16억 달러를 쓰겠다고 3년 전에 서약했었다.
저커버그가 새삼 큰손 자선가로 뜬 건 우연이 아니다. 최근 실리콘밸리의 젊은 억만장자들 사이에 일고 있는 자선사업 바람의 한 표징이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저커버그 부부가 자선사업 운영을 위해 설립할 예정인 ‘챈-저커버그 이니셔티브’가 비영리기관이 아닌 유한책임회사(LLC) 형태의 기업이라며 ‘눈감고 아웅’ 격의 돈벌이 꿍꿍이라고 비아냥한다.
저커버그 같은 IT분야 재벌 중에 큰손 기부자들이 많다. 작년 미국의 50대 기부자 중 만년 1위인 빌 게이츠 부부를 비롯해 구글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 페이스북의 전 CEO 션 파커, 이베이의 이란계 공동창업자인 피에르 오미디아르 등 12명이 IT분야 재벌이다. 이들이 낸 돈은 전체 50대 자선가들이 기부한 98억 달러 중 거의 절반인 47%를 점유했다.
이름도, 빛도 없는 큰손 기부자들도 있다. 뉴저지의 아프리카 난민교회에 누군가가 모기지를 갚으라며 5만2,000달러를 보냈다. 한 독지가는 매년 본보가 모금 캠페인을 시작하기 전에 익명으로 2,000달러를 기탁한다. 허름한 식당들을 찾아다니며 웨이트리스에게 ‘예수를 위한 팁’이라며 500달러에서 1만달러까지 남기고 간 익명의 기부천사(들)도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많은 돈을 기부(헌금)한 부자들을 칭찬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은 과부가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칭찬했다. 당시 유대의 렙돈은 오늘날 다임이나 쿼터처럼 아주 작은 화폐 단위였다. 예수는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 넣었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지적했다.
게이츠나 저커버그 같은 부자들의 기부금은 천문학적 액수지만 막상 한인 불우이웃들과는 거리가 멀다. 말라리아 퇴치 등 원대한 사업을 표방하는 탓이다. 우리의 불우이웃에겐 과부의 렙돈처럼 작지만 눈물과 사랑과 정성이 담긴 성금이 절실하고, 의미도 있다. 금년 본보 모금 캠페인에도 심시일반의 렙돈이 쇄도하기를 기대한다. 예수님도 칭찬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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