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키 신
하와이 웨딩스토리 대표
팔순이 지난 우리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는 요리 중에 딤섬을 빼 놓을 수가 없다.
자주 찾아 뵙지 못하는 불효를 한번에 만회 해 보려고 못난 딸은 좋아하시는 딤섬이라도 근사한 중국레스토랑에서 대접을 해 드리고 싶은데 우리 부모님은 한사코 즐겨 가시는 중국 식당이 있다. 차이니스 컬쳐 플라자 내의 한 식당이다. 엊그제 부모님의 딤섬을 테이크 아웃을 하려고 컬쳐 플라자 내의 주차장에 주차를 해 놓고서 계단을 걸어 내려 가는데 아랫층 중앙에 우리나라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정자 같은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따라 날씨가 얼마나 좋았던지 양털구름이 마치 스위스의 그것 처럼 파랗고 높다란 하늘에 여기 저기 펼쳐져 있는 게 정자의 빨간 지붕하고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서 난 계단을 내려 가다 말고는 넋을 놓고서 하늘과 정자 안을 번갈아 가면서 들여다 보았다.
정자 안에는 여러명의 그룹이 여기 저기 몰려 있었다. 장기를 두는 어르신들의 심각한 모습과 옆에서 훈수를 두는지 연신 손가락으로 장기판을 가리키면서 입을 가리고 웃는 어르신 그룹이 보였고, 반대쪽 구석엔 잘 차려 입은 중년의 아저씨가 섹스폰 같은 악기 연습을 빽빽~거리면서 하고 계셨다. 악기 소리가 시끄럽지도 않은지 팔을 괴고서 벤치에 대자로 누운 채 한손엔 부채를 들고서 오수를 즐기는 사람들도 보였다.
정자 안의 모습이 마치 신윤복의 그림에 나오는 몇 백년전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게 느껴져서 정말이지 침을 흘리지만 않았다 뿐이지 난 그 풍경에 넋이 나가 버렸다. 한참을 이쪽 저쪽 그룹을 번갈아가며 구경 아닌 구경을 하고 있는데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아...부럽다....로 시작된 마음은 금새 왜 우리 하와이 한인들은 이런 장소가 여태 없지? 중국인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차이나 타운을 만든다는 것은 고사하더라도 우리 이름을 내건 한인문화회관 하나 만드는 것이 이리도 남북통일보다 더 힘든 여정이란 말인가 하는데 생각이 미치자, 이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내 속에서 부아로 끓어 오르기 시작을 했다. 왜 ? 도대체 왜???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또한 비판을 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한국일보를 구독을 하고 있기에 서울과 하와이의 소식을 관심반,무관심 반을 적당히 얼버 무리면서 살아 온 이민살이였다. 그러다가 하와이 한인문화건립 모금 운동이 산불 번지듯이 번져 갈 때에 내심 옳거니 싶었었다. 아..이제야 우리도 우리 이름을 건 집 하나 생기는구나. 생각만 해도 오지고 신나는 일이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모님의 의도로 하와이에 첫 발을 내 딛은것이 80년대 초반이었다. 다수의 이민자들이 그렇듯이 부모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힘겹게 일을 하셔야 했고 한창 반항기에 접어든 우리는 마음 둘 곳이 없어서 친구네 아파트 바베큐 공간을 돌아가면서 아치트로 삼았었다. 어설픈 기타연주로 고향의 가요도 부르고 내 나라 말로 밤이 늦도록 수다를 떨었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 9층엔 그 옛날 사탕수수 농장의 사진 신부로 오신 하와이의 한인 이민 역사의 산 증인이신 이화학당 출신의 인텔리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다. 2층의 비좁은 우리 아파트에 오밀조밀 많은 식구가 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할머니는 가끔씩 나를 당신의 아파트에서 재우시곤 했다. 그때 할머니는 내가 묻지 않았는데도 그 당시의 이민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마치 고장 난 축음기 처럼 되풀이해 들려 주시곤 하셨다. 어렸던 그때에는 할머니의 신파조 나레이션에 별 감흥이 없었는데 나이를 먹어가며 그 아파트를 지날 때마다 할머니의 고단했던 삶이 자주 떠오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도 종종 있다. 이런 조상 들의 피와 땀과 한이 어린 곳이 하.와.이.다. 하와이 한인문화회관, 부모 세대는 친구들 아파트를 전전하면서 눈치를 보면서 어린 날을 보내야 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눈치 안보고 뛰어 놀면서 가,갸,거,겨를 배울 수 있는 곳이요, 고단한 이민생활 끝에 이제는 은퇴를 해서 자장면 내기 장기를 하루 종일이라도 맘놓고 둘 수 있는 곳, 우리 후손들에게 한국인의 정신을 가르치고 후손들의 얼굴이 되어 줄 그런 공간을 갖고 싶다. 그런데 지난 4-5년간 돌아가는 상황은 나 같은 이민자들을 참 우울하게 하는 소식 뿐이었다. 누구의 잘못으로 노무현 정부가 약속한 100만불이 날아 갔는지 묻고자 함이 아니고, 왜 백해무익한 법정시비를 시작했느냐고 따지고 싶지도 않고 아무 의논 없이 아파트를 구입 했느냐고 묻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용기를 내어 이 졸필을 쓰는 이유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를 논해 보자는 것이다. 이제 한 발짝씩 서로 양보를 하고 미래의 희망을 찾아 갔으면 한다. 한인회 중진들의 법정 공방전은 다리가 퉁퉁 붓도록, 하루 12시간이 넘게 일을 해서 아들 딸 대학 등록금을 내야 하는 빡빡한 우리 이민세대는 어려워서 모르겠다.
그렇게 모르면서 뭔소리냐고 하신다면 입 닫을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다. 이런 마음은 비단 나 혼자만의 푸념이 아니라 그 동안 말은 안했지만 너무나 답답해서 차라리 등을 돌리기로 한 내 이웃들의 마음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 단지, 모든 싸움은 끝이 있다. 누군가 양보를 하면 더 좋다. 그 싸움을 몇 만도 안되는 하와이 한인들이 이어가서야 되겠느냐 말이다.
한인문화회관은 우리의 것이다. 내 새끼들의 것이란 말이다. 하나님 앞이건 부처님 앞이건 나아가 마음에 손을 얹고서 정말 해결 할 방법이 법정 싸움뿐인지, 본인의 자존심에 속아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일에 관계된 자들의 양심에게 물어 보라고 말하고 싶다. 통일 한국을 바라보는 역사적인 이 격동의 시기에 적어도 나는, 내 자식이 내 나이가 되어서 에미처럼 차이나타운 컬처 플라자 계단에 서서 멍하니 가슴을 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감히 이 글을 올린다. 그 죄를 짓고서 죽어 우리 조상들을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아.. 그날 하늘은 참으로 아름다웠고 난 그 중국인들이 너무나도 부러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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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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