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한 흑인노예와 그 후손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뿌리’(Roots)가 미국TV 12부작 시리즈로 방영되며 전 세계적인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쿤타킨테는 1750년 이른 봄, 서아프리카 감비아 해안 주푸레 마을에서 태어나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씩씩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열일곱살 때 숲을 헤매다 노예사냥꾼에게 붙잡히고 만다. 온몸이 쇠사슬에 묶이고 양쪽 어깨 사이에 인두로 지진 노예 낙인을 한 채 미국 땅을 밟은 그는 메릴랜드 주 애나폴리스 부둣가에서 경매를 거쳐 버지니아농장으로 팔려간다.
그로부터 세 번의 탈출 시도와 실패, 네 번째 탈출에 실패하면서 오른발이 잘리지만 어린 딸 키지에게 자신의 고향 주푸레의 언어를 기억시켜 주려 애쓴다. 학대와 시련 속에도 뿌리를 알리는 일은 몇 세대를 거쳐 알렉스 헤일리에게까지 전해진다.
1976년 퓰리처상을 받은 알렉스 헤일리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뿌리’는 1977년 1월 ABC 방송에서 첫 전파를 탔고 한국에서도 방영되어 뿌리 찾기 붐이 일었다. 이 드라마는 전미 평균 44%를 넘는 시청률로 백인도 흑인도 다 같이 부당한 제도적 폭력에 분노했고 아프리카, 아시아, 미 원주민 등 소수 민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뿌리’가 리바이벌 되어 지난달 30일부터 케이블 TV 히스토리 채널 등에서 방영을 시작했고 한국에서도 방영되고 있다. 원작에서 내용을 가져왔지만 일부 캐릭터는 달라졌다. 강마을 평범한 소년 쿤타킨테가 아프리카 권력층 자손으로 나온다고 한다. 그만큼 흑인의 주체성을 살렸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은 오는 11월 대선 공화당의 사실상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백인 노동자와 몰락한 중산층의 인기를 등에 업고 이민자와 유색인종에게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 민주당의 사실상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은 이메일 스캔들로 FBI의 수사가 진행 중이다. 그 어느 때보다 인종문제와 갑과 을의 계층 간 갈등이 심한 지금, ‘뿌리’의 리바이벌 방영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 지 주목된다.
미국의 인종갈등 역사는 깊다. 1956년 흑인이 백인과 같은 버스를 타고 1957년 흑백이 고등학교에서 같이 공부하고 1965년 문자해독시험을 통과한 흑인이 선거를 할 수 있었다. 1966년 선거세금 없는 흑인 투표는 흑인인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과 말콤 엑스의 희생과 노력이 컸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의 마틴 루터 킹과 달리 말콤 엑스는 “흑인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독립할 수 있는 것만이 근본적 해결책”이며 “흑인은 흑인끼리 분리되어 자치구로 살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말콤 엑스 시절 유명한 모토인 ‘검은 것은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는 흑인으로서 독립된 주체성을 강조한다. 2014년 등장한 구호는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이다.
2014년 미주리 퍼거슨 사건, 볼티모어 폭동, 스태튼 아일랜드 사건으로 인한 뉴욕 전 지역 시위, 2015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의 백인 우월주의자 20대 청년 흑인교회 무차별 총격사건 등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인종차별 반대 소요는 보다 커지고 조직적이 되고 있다. ‘뿌리’가 처음 방영된 40여년 전과 사회분위기가 다르다.
폭동이 일어나면 백인과 흑인들이 보는 시각은 둘로 나뉜다. 흑인 대다수는 백인경찰의 부당한 흑인 대우가 시발점이라 하고 백인 대다수는 약탈하려는 자들이 인종차별을 빌미로 폭동을 일으켰다 한다. 아무리 소수자 쿼터제와 소수자 혐오범죄에 대한 연방법의 강력처벌이 존재해도 한인을 비롯, 모든 소수민족들은 혹시 불똥이 튈까 염려하고 실제로 은근한 차별을 당하기도 한다.
이제 막 드라마가 시작되어 잘 알 수 없지만 타협을 거부하고 ‘흑인은 흑인끼리’를 내세우며 호전적으로 가지 않기 바란다. 여러 인종이 다양한 문화 속에 묘한 조화를 이루고 사는 것, 이것이 미국의 특성이자 장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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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뉴욕지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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