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시작을 한국일보와 함께 하는 미 전역의 수많은 한인들에게 매일 아침 생생한 한인사회의 뉴스를 전달하며 미주 한인사회의 동반자 역할을 해온 한국일보가 어느덧 창간 47주년을 맞았다.
지난 1969년 창간이래 반세기에 가까운 47년을 한인 이민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정상의 신문으로 자리 잡은 한국일보는 항상 앞서가는 뉴스, 생생한 현장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으로 한인동포들과 함께 성장해왔다.
한국일보는 47년 창간독자는 물론,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가 함께 읽는 커뮤니티의 이익을 대변하는 신문으로 오늘도 미주한인사회와 주류사회의 소식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41년동안 한국일보를 구독하고 있는 장기독자 박희산 은퇴목사와 부인 박정자 전 산호세 한국학교(실리콘밸리 한국학교 전신) 교장이 1983년 당시 산호세 한국학교 행사 기사가 보도된 한국일보를 스크랩해둔 자료와 1986년 당시 신문 기사를 보여주고 있다.
41년 독자 박희산 은퇴목사
“목회활동과 한국학교 기반 함께 닦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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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산(79)씨 부부는 실리콘밸리지역 한인사회의 역사를 함께 일궈온 대표적인 인물 중 한명이다.
박 씨는 지난 1974년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실리콘밸리에 정착한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산호세 한인 침례교회에 출석, 안수집사로 활동하다가 목회를 결심하게 된 후 골든게이트 신학교에 진학, 목회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신학교에서의 공부를 모두 끝낸 박 씨는 목회 안수를 받고 1984년에 베델침례교회를 개척했다고 한다.
그 후 20여 년간 목회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에 하나가 현 SV한국학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산호세 한국어학교를 교회에 있는 한국학교가 아닌 SV지역 한인들의 한국학교로 성장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박 씨는 40여년의 세월 속에서 한국일보를 계속 구독하게 된 것은 편향된 논조가 아닌 공정한 글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뉴스의 다양성과 내용의 충실성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지금은 폐간되어 사라졌지만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타 일간지들도 많이 있었으며 다른 신문의 유혹도 많았지만 그저 좋은 정보를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꾸준히 구독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박 씨는 자신이 목회를 하는 과정에서도 한국일보의 도움은 초기 목회자들에게 크나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목회뿐만 아니라 산호세 한국어학교가 교회 내에 있다가 독립되어 나오면서 교장을 맡아 활동했던 부인 박정자씨의 활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전한다.
한국에서 13년간 교편생활을 하던 박 씨의 부인은 미국에 이민 온 후 한인 1.5세나 2세들에게 한국의 얼과 한국어 교육을 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교장에 취임한 후 남편 박 씨의 목회를 본격적으로 도우기 위해 맡았던 학교장을 그만둘 때는 학생수가 200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을 시켰다고 밝혔다.
현재 SV한국학교의 교가 역시 박정자씨가 가사를 쓰고 자신의 여고시절 선생님이셨던 당시 김귀한 부산대 교수가 곡을 붙여줬다고 알려줬다.
그는 학생들의 활동상이 한국일보를 통해 자세히 소개되면서 자신들의 아이들을 학교에 맡기고 한국어를 가르치고자 하는 부모도 급격하게 늘어났기에 현재의 SV한국학교의 발전에도 한국일보가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한편 박희산씨는 목회를 하면서 1987년에는 한국일보에 화요에세이 칼럼을 기재하기도 했으며 1990년에는 북가주 침례교회 협의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은퇴 후에는 현재 SV노인선교회에서 5년째 교제를 하고 있는 그는 부인 박정자씨와의 사이에서 1남2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딸과 며느리가 카이저 병원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큰 딸의 경우 린브룩 고등학교를 전교수석으로 졸업, 버클리에 입학했는데 당시 한국일보에서 단독으로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면서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키우는데도 한국일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감사를 표시했다.
박 씨 부부는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계속 한국일보의 독자로 남을 것이라며 한국일보가 더욱 더 성장하길 바란다는 인사말도 빼먹지 않았다.
40여년간 한국일보를 구독한 김충남 목사는 76세의 나이에도 젊은 목회자 못지 않은 활발한 목회 활동과 강연자로 혹은 글로써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41년 독자 김충남 목사(산호세 순복음교회 담임)
“장자 신문 한국일보 앞으로 더욱 빛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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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남 목사(75)는 지난 1974년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로 미국에 들어와 시카고에서 공부와 함께 개척교회를 1년간 운영하다가 조용기 당시 여의도 순복음교회 담임 목사로부터 실리콘밸리에서 새롭게 개척교회를 시작하라고 해서 확장일로에 있던 시카고 교회를 뒤로 하고 북가주에 자리 잡은 뒤 지금까지 40년간 목회를 계속하고 있다.
김 목사가 실리콘밸리로 이주한 뒤 1976년 8월 15일에 미국교회의 주일학교 공간을 빌려서 처음 시작했다고 하니 올해로 딱 40년째 북가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김 목사는 당시 목회를 시작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으로 많지 않은 한인들이었지만 그나마 한국일보라는 언론을 통한 전도가 되지 않을 경우 전도 자체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개척을 위해 처음 접했던 한국일보가 어느덧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며 자신의 반평생 이상 어쩌면 가족 같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지면이 2페이지 혹은 4페이지씩 나왔으나 초창기 교회 부흥회나 행사가 있으면 항상 광고를 하면서 교회 행사도 함께 알리는 등 한국일보와 윈윈관계를 유지하면서 도움과 협력을 함께 했다며 당시에 광고를 자신이 제일 많이 했었다며 추억서린 얘기도 들려줬다.
김 목사는 한국에서 문단(신춘문예, 현대문학)에 데뷔한 문학도(시로 등단한 시인)이다 보니 한국일보 행사 때 시를 쓰기도 하고 한국일보 종교난을 통해 글을 쓰기도 했으며 그 글들을 모아 또한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 목사는 현대문학 추천시인으로 순결문학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한국 기독교 문학사' '예수천당' '일사각오 - 순교자 주기철 목사 생애' 시집 '무덤에서 빛나리' 등 17권의 저서도 갖고 있다.
1980년대 5대 목사회장을 역임하고 1986년에는 산호세 교회협의회 4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김 목사는 어느덧 70대 중반의 나이가 됐음에도 여느 젊은 목회자 못지않게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도 김 목사는 최근 일본과 몽골에서 부흥회를 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한국일보를 너무나 사랑한다"면서 "한국일보를 통해 많이 눈물도 흘리고 위로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또한 한국일보가 앞으로도 한인동포들에게 충분한 자양분이 되는 신문으로서 더욱 발전해 나가길 독자의 마음으로 바란다고 전했다.
김 목사는 자신이 신춘문예와 현대 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다 보니 장기독자인 자신의 마음을 시로 표현해 보겠다며 시 한수를 들려주면서 인터뷰를 마무리 했다.
-장자신문 47년-
북가주 이민역사에 유일한 벗이 되어
읽고 또 읽어서 약이 되는 신문
금문교 다리에 눈부시게 비치는 햇살처럼
엘카미노 거리에 가로수 잎사귀처럼
오늘도 내 마음에 고국의 얼굴을 대하듯
40년을 읽고 또 읽었다네
내가 읽고 아내가 읽고 아들딸도 읽고
3살 박이 손자 민석이도
갓 태어난 손녀 민순이도 읽어야 할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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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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