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간 사업가서부터 온국민이, 사재 쾌척·과기 발전 열망 큰데
▶ KAIST는 정치적 분규 늪으로
서울경제신문에서 활약했던 원로 언론인이자 현역 여류 사업가인 이수영(83)씨가 지난해 말 ‘이수영 자서전-왜 KAIST에 기부했습니까?’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냈다.
저자는 서울경제에서 재계 출입기자로 활약하며 삼성 이병철, 현대 정주영 회장을 포함한 대기업 회장들을 무시로 만날 수 있엇던 드문 기자였다. 그래서 저자는 서울경제 시절이 자신의 인생에서 황금기였고 서울경제는 자신의 ‘친정’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저자는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서울경제가 강제 폐간될 때 함께 강제 퇴직당한 뒤 남자도 힘에 부칠 목축업으로 제2의 인생을 개척했고 골재채취업에도 손을 대 재산을 모았다.
1988년에는 여의도백화점의 한 층을 매입해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저자는 현재 지하 4층, 지상 14층의 여의도백화점 건물의 3분의1 지분을 소유한 안정적인 부동산 사업가지만 이 재산을 지켜내는 과정에서 조폭들, 또 암과의 싸움을 치러야 하는 등 독신녀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여기자 출신의 성공한 사업가라면 드물기는 해도 특별할 것까지는 없다. 저자가 특별한 것은 그의 남다른 기부정신이다. 자서전의 부제가 말해주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대한 기부를 가장 보람된 일로 여기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왜 KAIST냐’는 저자의 물음에는 간단치 않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존중, 연고주의를 초월한 기부가 그것이다. 누구나처럼 저자도 상속이 자손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은 해왔다. 부자들의 유산 싸움으로 인한 인륜파괴 현상을 누구보다 많이 봐온 터였다.
저자가 KAIST에 사후 기증하기로 한 재산은 2000년 LA에서 350만달러에 사 현재 시세가 700만달러인 저택이다. 이 집을 살 때 저자에게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있었다.
미국에서는 부동산 매매계약서의 매입자 난에 매입자의 지위를 기재하도록 한다. 그 난을 ‘미혼녀(unmarried woman)’로 기재하는 것도 떨떠름했으나 더욱 놀라운 것은 매입재산의 피상속자를 지명하지 않으면 상속자가 죽은 뒤에나 상속재산에 문제가 발생할 때 재산이 국고로 귀속된다는 조항이었다.
독신녀의 입장에서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심정으로 유산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하기 시작하던 그 무렵, 우연히 서남표 당시 KAIST 총장을 TV에서 보게 됐다. 그는 국가발전에 과학기술의 힘이 얼마나 중요하며 KAIST의 역할과 임무가 무엇인지를 역설하고 있었다.
그 순간 ‘바로 저것’이라고 결심했다. 2012년 연고가 없는 서 총장과 KAIST에 대한 유증계약은 그렇게 이뤄졌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법학도답게 저자는 자신의 결정을 법리적으로 정리했다.
새로운 물건을 만들고 그 물건의 부가가치를 창조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은 과학과 기술의 힘이고 법은 다만 물건의 공정한 거래나 공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규범을 만드는 데 기여할 따름이라고.
오래전부터 서울대 법대 장학재단 일을 보며 45억원을 모금한 실적이 있었던 저자였다. ‘법보다 과학기술’을 선택한 저자의 결정에 동문들로부터 원망의 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저자에게 대꾸할 말은 있었다. 장학사업을 하면서 후배들이 장학금에 담겨 있는 고귀한 뜻을 이해하는지, 공부한 지식으로 사회를 위해 얼마나 좋은 일을 하는지를 생각하면 회의가 들기도 했다고.
‘이수영 자서전’을 통해 새롭게 알 수 있었던 것은 KAIST에 대기업 회장도 아닌 민간 독지가들이 수억원에서 수십·수백억원까지 사재를 쾌척하는 사례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한국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에 반해 KAIST에서는 학내분규가 그치지 않고 있다. 2013년 서 총장이 불명예 퇴진한 터에 신성철 현 총장을 둘러싸고 정치성 분규의 조짐이 일고 있다. 그런 분규가 국민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퇴색시키지 않을지 적이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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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건 전 서울경제신문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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