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스 리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리서치매니저
“그 옷 싫어! 이 옷 입을래.” “내가 혼자 할 수 있어. 엄마는 도와 주지마!”
“오늘은 더워서 그 옷은 안 돼.” “그건 너 혼자 못해. 시간 없어. 엄마가 할게.”
바쁜 아침, 4살 아이와의 소모적 실랑이가 부쩍 늘었다.
“얘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자기주장이 강한 거야?”
소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해물인지 정하기도 어려워 순두부도 섞어 순두부만, 피자도 콤비네이션만 고르는 부부에게 아이의 이런 모습은 신기하면서도 낯설다.
햄릿증후군. 선택의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끊임없이 망설이고 고민을 거듭하는 현대인들을 일컫는 말로 결정장애, 선택장애, 메이비 세대 (Generation Maybe)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원한 난제일 것 같던 “짜장면이냐 짬뽕이냐”가 짬짜면의 등장으로 해결되나 싶더니 이제는 짬짜면과 짬짜밥 사이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정보, 상품, 옵션 과잉의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뭐 이리 선택하고 결정할 일이 많은지... 고민하는 것도 귀찮아 ‘누가 대신 좀 정해주면 안되나?’ 싶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대신 선택해드린다는 선택 솔루션, 사용자가 좋아할만한 정보를 알아서 골라 제공해주는 큐레이션 서비스, 고객의 대략적인 취향만 파악해 알아서 화장품, 옷, 식재료 등을 골라 보내주는 서브스크립션 커머스(subscription commerce) 등이 가장 촉망받는 미래산업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아무거나 세트’, 이것저것 적당히 섞여있는 ‘결정장애 메뉴’ 등을 내놓는 식당들이 생겨나고,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애매하지만 그래서 안심되는 ‘썸’이라는 신종 관계는 이미 연애 시작 전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메이비 세대를 겨냥한 각종 서비스들이 쏟아지며 선택과 결정이 버거운 이들에게 점점 편리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지만 문제는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남에게 묻기만 하는 이러한 ‘어른아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오늘 저녁 메뉴를 추천해달라는 것에서부터 이사 갈 집을 골라달라는 글까지, 크고 작은 결정들에 도움을 호소하는 글들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어려서부터 자율적인 선택의 경험과 기회가 적고 확실한 정답만을 요구하는 한국식 교육에 길들여지다 보니 사회에 나와 정해진 답이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어렵고 불편하다. 학원, 학교, 전공, 직업, 배우자까지도 부모가 나서서 정해주는 일이 허다한 가정과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엿한 성인이 된 후에도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해 고민만 반복하다 결국 포기하거나 남에게 선택을 미루게 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선택에는 결과가 따르고 때로는 후회와 대가, 책임이 따른다. 선택을 미루고 결정을 전가하는 근간에는 최상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 결과에 후회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내가 결정하지 않은 선택은 내 탓이 아니라는 책임회피가 깔려있다. 결정장애가 만연한 사회는 점점 소극적이고 무기력하고 무책임해질 수밖에 없다.
하버드대의 탠 키들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자신의 선택이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아이들이 더 긍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어려서부터 자율적으로 어려운 결정들을 많이 해본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보다 정확히 알고 있고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에 대한 책임의식도 학습되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서 “내가!”를 외치는 아이의 적극성과 자신감, 귀여운 패기를 비효율적이라 모른 체했던 시간들이 아쉽다. 내일은 조금 일찍 일어나 자신의 수준에 맞는 선택과 노력을 하는 아이를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켜보며 응원해주어야겠다.
죽이 되면 어떻고 밥이 되면 어떤가. 잘되면 성취감과 자신감을 얻을 것이고 안되면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지는 연습과 기회의 시간이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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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리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리서치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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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누울 자리를 보며 행동 하라 했는데, 자기를 먼저 키우고 선택해도 늦지않을 백세 시대가 아닐까 잠시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