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추억: 김중현 장로(퀸즈한인교회)
▶ 12일 별세 향년 85세
김중현(오른쪽) 장로와 부인 김석련 권사.
1981년 우드사이드 대동면옥 열어
뉴욕요식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
대동연회장 오픈 연회문화 정착
평생을 모범적인 신앙인의 삶
1934년 6월18일 평안남도 강동군의 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김중현 장로는 16세 때 일어난 6.25전쟁으로 인해 부모와 헤어진 후 혈혈단신으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김 장로는 어린 나이에 피난민들이 겪어야 하는 온갖 고생을 감수하며 우여곡절 끝에 숭실고등학교와 숭실대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1959년 김석련 권사를 아내로 맞이해 단란한 가정을 이뤘으며 슬하에 두 딸(정옥, 정원)을 두고 딸들의 재롱 속에 단란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이후 1976년 가족 모두 파라과이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삼시세끼 냉면을 먹을 정도로 냉면을 좋아했던 그는 파라과이에서 직접 요리를 배우는데 힘썼으며 한국에서 한식당을 경영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식당 ‘대동면옥’을 열게 된다.
식당 이름은 평남 대동강 유역에서 자란 고향을 떠올려 ‘대동’으로 지었다. 갈비를 먹은 후 냉면을 찾는 북한식 식습관을 고려해 두 가지를 주 메뉴로 한 식당은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김 장로 가족들은 1981년 뉴욕으로 이민을 온 뒤 이해 12월 퀸즈 우드사이드에 대동면옥을 열었다. 개업 후 손님들에게 번호표를 나눠줄 정도로 호황이었던 식당은 영업 마감 전에라도 재료가 다 떨어지면 문을 닫을 정도로 품질 유지에 큰 신경을 썼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는 가운데 1986년에는 서니사이드로 확장 이전해 한인사회 최초로 300명 수용이 가능한 대동연회장을, 1996년 베이사이드 대동면옥, 1997년 맨하탄 대동면옥 등을 차례로 열었다. 대동면옥은 고향을 떠난 이민자들에게 고향을 맛을 보여주며 미국에서 한국 음식 문화의 선도적 역할을 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2001년 서니사이드 업소에 화재가 난 후 2006년 플러싱 노던블러바드 150가 코리아빌리지에 새로 자리한 대동연회장은 2만3,000스퀘어피트 규모로 대표적인 한인 연회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김 장로는 파라과이 거주 시절 이민동우회를 창립해 한인들의 친목을 도모한 경험을 바탕으로, 뉴욕에서는 요식업 종사자들의 우호적 증진을 위한 모임인 요식업협회 회장으로도 활동하며 요식업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1997년에는 뉴욕에 거주중인 실향민들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민회를 창립하고 회원들의 결속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썼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 어떠한 시련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신념으로 평생을 모범적인 신앙인의 삶을 산 김 장로는 1988년 퀸즈한인교회에 입교한 후 2001년에 장로장립 후 교회 부흥을 위해서도 힘썼다.
퀸즈한인교회 이태선 장로는 “뉴욕 이민 사회와 많은 업적을 남긴 김 장로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저희들의 곁을 떠나셨다. 인간의 욕심으로는 곁에서 천수를 누리며 함께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크지만 이 세상 모든 일을 잘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수고와 근심 걱정이 없는 소망의 하나님 품 안에서 안식을 취하고 계실 줄 믿는다”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김중현 장로(앞줄 왼쪽 5번째)의 1994년 회갑연에 모인 친지와 대동면옥 관계자들.
“아버지, 우리 아버지…”
■ 조사-큰딸 제니 차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마지막 병치레 하시면서도 저희에게 보여주신 아버지의 환한 웃음만 기억하고 싶습니다.
평생 동안 같은 비행기로 여행하다가는 온 가족이 다 같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셔서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났던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버지 칠순 때가 되어서야 온 가족이 함께 떠난 긴 여행은 두 번밖에 없었던 것이 생각나 죄송한 마음에 이후에는 비록 휠체어 타고서라도 가까운 해변이나 공원으로 바람을 쐬러 함께 다녔습니다.
갈수록 건강이 쇠약해지시면서 그렇게 원하셨던 일본 여행과 북한에 가서 아버지 형제들을 찾아드리겠다고 한 약속을 못 지켜서 정말 죄송합니다.
평생 무뚝뚝하고 소리 잘 지르시는 성격에 사랑한다는 표현 한번 못하시더니 마지막에 ‘사랑한다, 수고했다, 고맙다’고 하셔서 매일 저녁마다 조용히 울곤 했습니다.
모태신앙이셨던 아버지께서는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셨습니다.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강조하시고 늘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사업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신실하신 하나님만 믿고 정직과 신용을 바탕으로,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해도 나중에는 다 득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제게 개척정신에 대한 구체적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하시며, 파라과이에서 무릎을 다치는 오토바이 사고로 죽음의 위기를 넘긴 것을 비롯해 많은 고생을 하셨지만 또 다른 고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음에도 낯선 미국 땅으로 왔습니다.
남들은 자녀공부 때문에 미국으로 떠나오지만 저희 아버지는 시민권 취득 후 북한에 있는 형제들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으로 오셨습니다. 시민권 취득 이후 세번이나 북한을 방문했지만 번번이 친형제들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셔서 제가 아버지와 같이 가서 형제들을 찾아드린다고 했지만 결국 그렇게 기도하셨던 통일도 못 보시고 제게 선교의 사명만 남기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고향땅 이천 기림리에 가서 교회를 다시 지어드리고 고아원, 양로원, 병원 학교를 짓는데 이바지하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진정한 나눔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미국에 정착한 직후 파라과이에서 챙겨온 돈을 소진하는 상황에서도 교회분들을 집으로 초대하셔서 식사를 대접하시고 뉴욕일원에서 최초로 노인분들을 초대해서 무상으로 식사와 여흥을 제공하셨습니다. 한국의 조용기 목사님이 뉴욕에 오셔서 집회를 인도하실 때는 700여명을 대접하셨고 교회 찬양대 등 항상 손대접이 풍성한 분이셨습니다. 늘 가난한 선교사님들, 교역자들, 전도사님들을 오른손이 한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몰래 도와드리곤 하셨습니다. 이런 아버지께서 이제 그 한 생애를 다 사시고 하나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겠습니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합니다.
■ 조사-손자 주민우
I first wanted to thank you all for being here tonight. I know that it would mean a lot to my grandfather. He always placed great importance on family and friends, and would regularly give back to the community. When I think about my grandfather, I picture a man of dedication, love, selflessness, integrity, grit, and passion. In my mind, he was the physical embodiment of resilience in extreme adversity. As a matter of fact, he did more than just endure the hardships of his life. He overcame them and dedicated himself to a life of success. However, I don’t believe that these words do enough to describe just how caring he was. I like to remember old memories, and how he always had a smile on his face when I would visit him.
Whenever we came to visit, he would call us as we were driving up, eager to know exactly when we would arrive. We would always find him waiting by the front door with a huge smile. My grandfather loved to spend time with me, and always strived to give me things that he never had or experienced as a child. In him, I saw a true example of unconditional love. I still regret that I did not spend more time with him or get to know him better. Despite our physical distance and infrequent meet-ups several times a year, his love never once wavered. I often wonder if I deserved such love, but am happy to have been blessed with it all the same, and am honored that he was my grandfather. Today, I act knowing that his love remains, and that he is still watching from a better place of peace and tranquility. I strive to maintain his legacy, uphold his unwavering values and make him proud. Although he may no longer physically be with us, his deeds and his memory will live on.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