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연희 사범 (전 미 태권도연맹 부회장) 지난 3월21일 별세. 향년 77세
2015년 새해 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앞줄 오른쪽 네 번째가 박연희 사범. 박사범 왼쪽은 부인 박혜선씨
1988 서울올림픽 당시 성화봉송 주자로 나선 박연희 사범.
대리석 격파시범 태권도계 역사
미국태권도연맹 설립에 큰공헌
한인사회 리더로 수많은 업적
1942년 7월24일 전북 정읍에서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난 박연희 사범은 전주에서 고등학교 재학 시 뛰어난 태권도 기량을 인정받아 우석대학교에 태권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손이 변형된 것으로도 유명했던 박 사범은 악수를 해본 이들 모두가 놀랄 정도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혹독한 수련에 임했다.
그의 차원이 다른 격파력은 힘과 기력의 결정체로 양손날 동시격파와 대리석 격파 시범은 태권도계에서 전무후무한 역사로 남아있다.
겨루기에서도 뛰어났던 그는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수년간 무패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후지TV 방송에 출연해 발차기와 대리석 격파를 선보이며 가라테의 본 고장인 일본에 태권도의 진수를 전파하기도 했다.
1972년 도미한 박 사범은 한인사회 리더로서 수많은 업적 남겼으며 태권도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태권도 세계화에 온 힘을 쏟으며 태권도인들에게 귀감이 됐다.
미국 태권도 연맹 설립에 큰 공헌을 했으며, 1993년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제1회 세계 태권도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사비를 충당할 정도로 열정을 보였으며 당시 대회 중계를 NBC가 맡아 태권도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는 이듬해 프랑스 파리올림픽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회의에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 같은 태권도에 대한 열정은 그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으며 이민 생활동안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먼저 걱정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움으로써 한인 사회에서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작고 전인 지난해 10월 미국 전역과 한국에서 온 지인 등 120명이 박 사범을 보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박 사범은 참석자들에게 환한 미소를 보이며 소중한 추억을 쌓기도 했다.
척추수술 후 발병한 합병증으로 인한 장기 손상으로 6년간 투병 후 지난 3월 작고한 그의 장례식에는 1,000여명의 조문객이 그가 사랑하는 태권도와 함께 성공적인 인생을 산 인생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유족으로는 96세의 노모와 동생인 박연환 뉴욕오픈태권도대회장, 부인인 박혜선 암 내과 전문의, 딸 제시카와 아들 앤드류씨 등이 있다.
“손이 기형이 될 정도로 매일 피나는 격파연습 생생”
■ 친구 박연희를 생각하며-최창신 대한태권도협회장
1971년 일본 후지TV 방송에 출연해 격파시범을 보이는 모습.
우리의 친구 박연희 사범, 그는 태권도계에서 보기 드문 크고 멋진 산입니다. 아마도 그와 같은 태권도인은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세상 어디에도 살아가는 방법을 먼저 배우고 삶을 시작하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조셉 콘래드의 말처럼 ‘인생이란 우스운 것, 부질없는 목적을 위해 무자비한 논리를 불가사의하게 배열해 놓은 것일 뿐(Droll thing life is, that mysterious arrangement of merciless logic for a futile purpose)’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박연희 사범을 포함한 주변의 또래들은 이미 70대 중반의 노년기를 터덜거리며 모래 위를 걸어가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리막길인데도 힘이 듭니다. 체력은 물론 기억력·추진력·박력 등 어느 것도 전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과거와 추억의 세대입니다. 추억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만일 많은 추억 가운데 하나씩만 말해 보라 한다면, 저는 박 사범의 기형이 된 ‘손날’을 내세우겠습니다. 우리가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수도(手刀)’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수련생 대부분이 각자 개인적으로 주먹 단련을 했습니다. 저도 2미터 길이의 굵은 통나무를 마당에다 깊이 묻어 놓고 매일 몇 백회씩 주먹(정권)과 손날 훈련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러나 친구 박연희 사범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일 오전에 남산에 올라 몇 천 번씩 생나무 굵은 줄기를 때린다 했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긴 세월 꾸준히 그렇게 단련했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우선 손날 부분이 얼마나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는지 악수를 해 보면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악수가 제대로 안 될 만큼 기형적으로 커져 있었지요. 그러나 더 굉장한 변화는 그의 엄청난 격파력입니다. 1967년 장충체육관 본부석 맞은편 마루에서 보여 준 그의 손날 격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이적인 힘과 기량의 결정체였습니다. 당시 어지간한 수련생들도 보통 벽돌 한두 장씩은 한쪽 손날로 부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박 사범의 경우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격파력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고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 연마한 노력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탁월한 태권도인이었던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격파 또는 연무 시범만 잘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겨루기에도 뛰어났습니다. 1966년 국가대표 선수단이 두 번째로 일본에 원정 경기를 갔을 때, 두 차례의 경기에서 박 사범은 선수로서 일본 선수들을 완전히 제압했습니다.
“형님을 생각하며”
■조사- 동생 박연환
우리 형제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보릿고개를 겪으면서 자랐지만 부모님께서 조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약간의 재산으로 주변에 어려운 이들에게 베풀며 지냈습니다.
저는 태권도를 9살에 시작했는데 10살 터울의 형이 뒷발차기를 화려하게 하는 모습에 감명 받은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제가 전국 고등부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형이 제게 끼친 영향력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뉴욕에 도착한 1980년 당시 저보다 먼저 뉴욕에 정착해 롱아일랜드에서 태권도 보급에 힘쓰던 형이 운영하던 도장을 물려받았습니다. 도장을 물려받은 사범과 실력을 겨루길 원했던 수많은 외국인들을 마주하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화려한 실력을 뽐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형이 개척해놓았던 태권도의 길 덕분이었습니다. 이제는 태권도 사범이 된 제 아들과 함께 도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형이 먼저 닦아놓은 태권도의 현지화가 이제는 제 아들을 통해서 더 퍼져나갈 것입니다.
형은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여러 번 등록금을 지원해줄 정도로 제게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항상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아 어려운 이들을 보면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서 도와주는 인간미가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저의 여생도 형에게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하며 베푸는 삶을 살아가기를 다짐해봅니다.
<이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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