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지도 교수님의 독촉 메일이 왔다. “진희, 글쓰기에 시간을 너무 많이 쓴다. 어서 졸업 논문의 다음 챕터를 제출하시오.” 늘 조마조마 하던 차에 올게 왔다. 졸업논문 챕터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랑하는 지도교수님의 이메일. 마감 기간이 꼬였다.
꼬인 마감을 풀기 위해 케케묵은 생각의 덩어리를 매주 대학원 글쓰기 센터에 가져갔다. “표현이 너무 평이해요. 이게 아니잖아요. 더 있어요. 할 수 있어요! 브레인스토밍 하듯 필요한 표현들을 미리 쓴 다음 다양한 표현 중에서 표현을 고르세요. 지금 여기에 써 보세요.”
글쓰기 멘토는 소크라테스 식 산파법을 교육철학에 접목했는지, 말 한마디로 나의 마음을 꾸욱 꾸욱 누르며 고인 생각의 틀을 주물러 깨운다. 생각이 글을 입고 톡 튀어나오게 훈련시킨다. 글에 대한 비판이 나에 대한 비판으로 들린다. 글은 한번 더 꼬이고 마감은 한번 더 늦춘다.
글쓰기는 내 취미고, 브레인스토밍은 특기였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던 그 종목들은 어느덧 낯설게 다가와 이제는 새롭기까지 하다. 글쓰기는 하 세월이 걸리고, 쓴 글은 읽기가 싫다. 내가 브레인스토밍을 좋아했던가? 머리가 돌 마냥 굳어버렸다.
졸업 논문 이외의 모든 활동은 왜 이렇게 유쾌하고 즐거운지. 화장실 청소마저도 행복하다. 박사보다 청소 요정 유튜버가 되고 싶다. 글쓰기 이외의 모든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흐른다.
이러다 보면 내가 누군지 무엇을 하는지 가끔 잘 모르겠다. 생각이 번잡하면 글은 생각보다 더 얽혀 맑게 보지 못한다. 글은 생각을 따라 롤러코스터를 탄다. 또 꼬였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삐딱해진다.
흔들리는 정체성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미래에 대한 소망도 흔든다.
내가 온 길이 맞는 길인지, 지금 맞게 가고 있는지. 글 쓰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내가 쓴 글을 다시 보고 고치고 몇 번을 반복해야 할지. 이 길이 과연 졸업 이후의 길과 이어져 있는지. 이걸 하고 먹고 살 수 있을지.
오 나는 왜 이렇게 어려운 논문 주제를 잡았을꼬. 탈북자의 삶, 그 만큼이나 꼬여버린 나의 생각과 삶이여. 처음에는 인터뷰 데이터에 적힌 그들의 고된 삶에 함께 지쳐 울다가, 이제는 바위틈에서도 꽃 피우는 그들의 강한 생명력에 경외감을 갖기까지 한다.
지친 어느 날, 터벅터벅 집에 걸어오는데 집에 소포가 도착해있다. 내가 좋아하는 대한민국 씽크탱크 도태우 변호사님의 싸인북, “최진희 선생님” 첫 장에 남겨진 저자의 정갈한 글씨체. 내 이름, 저자 이름, 석자만 있다. 담백한 성격같이 별다른 말은 없다. 포럼 참석여부를 밝혔던 나에게도 태평양 건너 책을 보내주는 넉넉함에 감동했다.
최근 이 분의 글을 통해 황장엽씨의 글을 새롭게 읽고 적용하게 되었다. 저자의 삶과, 강의, 그리고 그의 활동은, 우리의 학문은 의미 없지 않다고, 현실을 통찰 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너는 괜찮다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 하라고 말없이 등 두드린다. “나도 여기서 나의 달려갈 길을 가며 싸우고 있어! 너도 거기서 잘 싸워라.”
이외에도 12월의 선물을 하나씩 받았다. 겨울방학에 집에 초청해 주신 샌더스 교수님의 크리스마스카드와 비행기 표, 선배가 한국에서 보내준 과자 선물 세트, 옛 회사 동료가 보내준 책 세트. 일본에 계신 교수님이 보낸 뜬금없는 이메일 “너 살아있니?(Are you okay? Just checking)”
하루살이에게는 하루살이의 은혜가 있다.
박사 마지막 년차. 나 스스로가 나에게 짐이 되고, 선택에 자신이 없는 시기. 또한, 끝이 보이지 않는 졸업논문과 진로로 인해 생각과 마음이 삐딱해질 때, 과거로부터 면면히 이어진 작은 인연이 오늘의 나에게 딱 하루만큼 살아갈 힘을 준다. “힘내”
하루만큼의 은혜. 하루살이인 진희에게 하루의 은혜만 면면히 이어진다면, 나는 이제 살아갈 수 있다.
<
최진희 펜실베니아 주립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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