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장하고 있는, 당시 착용했던 시계와 유사한 모델의 시계.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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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의 시계
어느 누구나, 인생이란 시간과의 싸움이며 경쟁이다. 시간에 쫓기고, 시간에 맞추며 살다, 시간이 되면 떠나는, 그래서 그 누구도 시간에 자유로울 수 없는 인생. 그 인생에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시계는 상당히 작으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상당히 자상하셨던 부모님은 중학생이던 형에게 일찌감치 시계를 선물해 주셨지만, 둘째인 나는 그런 선물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무척 호기심이 많았던 형은 불과 몇 달 만에 그 시계를 해부하다 완전히 고장내버렸기 때문에, 아직 철부지 같은 사내아이들에게 시계는 선물용품이 아니라고 단정 지으신 모양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님은 이미 미국으로 사업차 떠나시고 점차 가사 사정이 녹록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사춘기에 접어든 나에게 시계란 이미 사치품이었으며 아무런 기대 또한 없었다.
# 포트 벨보어에서 산 첫 시계
그리고 1977년 불같은 여름 주말, 미군에 입대한 나는 포트 벨보어(Ft, Belvoir) 군 부대 내 PX에서 내 인생 처음으로 시계 한 점을 구입하게 되었다. 국방색 ‘winding Timex’ 시계는 맛깔스러운 심플한 동근 디자인에다 손목에 착 감기는 canvas 시계줄이 내 마음에 너무 들었다. 더욱이 가격에 견주어 시간이 너무도 정확한 것이어서 매일 차고 다녔다.
그때 새삼스럽게 느낀 것이 옷이나 신발은 매일 같은 것을 착용할 수 없지만, 시계는 매일 같은 시계를 몸에 붙이고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왜 한국 분들이 시계를 결혼 예물로 선호하는지도 공감 되었다. 나는 그 시계를 차고, 온갖 군대 훈련을 치렀고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한 몸이 되어 포트 힐스(Ft. A.P. Hills)와 포트 마이어(Ft. Myer) 등 수많은 곳을 휘졌고 다녔다.
# 종로 5가 뒷골목 주점에서
그리고 일 년 후, 1978년에 다시 찾은 서울의 겨울 거리는 매섭도록 춥고 어두운 모습으로 젊은 청년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빙 크로스 비의 ‘White Christmas’가 울려 퍼지는 종로 거리를 고등학교 동창들과 뚜렷할 목적지도 없이 이곳저곳 다니며 한 잔씩 하다, 종로 5가 뒷골목 주점에서 통금 전까지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왜 종로 5가냐고? 당시 의정부, 동두천으로 가는 직행 택시들이 종로 5가에 줄지어 서 있었고, 난 동두천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는 캠프 하비(Camp Hovey)라는 미 2사단 소속 군인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허름한 유리 여닫이 문안의 주점 모습은 당시 우리 나이 또래들이 선호하던 경양식이나 양주 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거리의 포장마차 마냥 접근이 수월해 보이지도 않았지만, 중년의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하여 어렵게 문턱을 넘어서게 되었다.
손님이라고 우리 일행 3명이 전부. 찬바람을 피해 썰렁한 구석에 셋이 앉아 술을 시키니, 아주머니가 손 빠르게 벌겋게 달아오른 연탄 화로를 우리 옆으로 갖다 주셨다. 그리고 오뎅, 무가 수북이 담긴 양은 냄비가 곧바로 화로 위에 올려졌다. 술이 돌고, 전혀 쓸모없는 얘기들이 오고 가다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취해 있었다.
# 술값이 없어 난감할 때
누구인가 통금시간이라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고, 우리는 술 계산을 해야 하는데… 그때, 아뿔싸, 돈이 없는 것이었다. 두 친구는 아직 학생 신분들이었고 나는 주머니에 돈은 있었으나, 술값을 내면 동두천까지 가는 택시비가 없어지는 난감한 상황.
그런데, 유복하게 생기신 주인아주머니가 서브 하면서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미군이고, 제2사단에 근무하고 있으며 곧 택시를 타고 군에 복귀해야 하는 그런 내용들을…. 돈이 모자란다고 하는데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으시고, 내게 다가오시더니, 내 왼 손목을 눈으로 가르치시는 게 아닌가!
아! 내 첫 시계, 내 첫 사랑. 그러나 그렇게 황당하게,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리 둘(나와 내 시계)은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물론, 아주머니는 그 시계가 어떤 시계인지, 얼마인지 알 턱이 없었다. 단지, 앞판에 새겨진 ‘Made In USA’와 뒷면에 새겨진 영어 문구가 제일 중요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천대받는 미제가 당시는 없어서 못사는 물건들이었기에….
# 내 몸에서 떠나간 시계
40년이나 지난 지금도 오른 손으로 풀어 비워진 왼손목을 바라보며, 그 아주머니에게 내 시계를 건네던 기억이 뇌리에 불로 지진 모습으로 타투(tattoo)되어 살아있다.
우리는 그 주점 유리 여닫이문을 나서며 늘 그래왔듯이 젊은 호기로 소리를 지르고, 서로의 등을 툭탁거리며, 한 친구는 다음 휴가에 찾으면 된다고 하고 또 다른 친구는 별 말이 없었지만 서로 다 이해하는 침묵이었다.
그리고 다음 휴가 날, 늘 그러했듯이 8군 버스에 내 몸을 싣고 서울로 향했지만, 종로 5가 그 술집을 찾지는 않았다. 그날, 막판 술이었기에 술도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으며, 그 정도의 술값은 내 주머니에 항상 있었기에 술값 때문만도 아니고 그렇다면 무엇이 내 발길을 그리 이끌지 않았을까?
그것은 이미 내 몸에서 떠나간 그 시계는 그동안 그 아주머니의 아드님이나 조카 누구인가가 차고 다녔을 것이 너무도 분명하였기 때문에 굳이 찾아가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당시에는 술값 대신 시계를 맡기고 떼이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서울에 살던 내 동창 중 한 명이라도 내 시계를 찾아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물론,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에도, 우리들은 무수히 많은 술을 같이 마셨지만, 그 아무도, 내 시계 이야기를 하는 이는 없었다. 마치 그 일이, 그날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 다시 찾지 않은 연인처럼
78년도 겨울은 젊은 모두에게 그렇게 힘든 날들이었다. 젊은 호기는 있었으나 주머니는 비었고, 가벼운 양복 사이로 찬바람은 스며들고, 얇은 가죽 구두는 서울의 겨울 거리를 견뎌낼 만큼의 내구성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내 친구들의 호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친구들 중 유일하게 직장이 있고, 돈벌이 하는 총각이었던 나는 지금 그 호구 시절이 그립다.
몸에 지니던 물건이든, 내 몸을 맡기고 살던 집이든, 깊은 애정을 나누던 연인 관계마저도, 한번 떠나면 다시 찾기 힘들다는 것이 인생의 교훈이 아니겠는가? 마치 까까머리 동정의 숫총각들이 그 순정을 역전 아가씨들에게 바치듯이, 술 몇 잔에 잃게 된 시계. 술 외상과 길거리에 즐비했던 전당포들, 그리고, 길 위에서 점차 잃어버린 젊음의 패기와 순정들.
내 첫 사랑, 그 시계는 그 누구의 손목에서 그 어떤 세상을 같이 하며 지냈을까? 다음은 좀 더 드라마틱한 두 번째 시계 스토리를 하겠다.
글·사진/ Jeff Ahn
(jahn81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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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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