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반-1970년대 초반 사진. 손에 가방을 드신 어머니(충북 농공주식회사, 구로공단 가발공장 사장)가 젊은 종업원들과 같이 고궁 어디에선가 찍은 사진. 당시 나이 어린 종업원들은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해서 공장에 취직한 경우가 많았다. 앞줄 어린 남자 종업원들의 얼굴이 너무 앳되다.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 무남독녀의 제안
그녀는 무남독녀. 따라서 절대 한국을 떠나서 외국에 살 의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본인 아버님의 사업도 있고… 헐!
아니, 내가 미군이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면서, 어떻게 그런 제안을…. 이것은 선의 전제조건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항인데….
나는 묵묵히 걸었다. 내리는 눈은 눈살이 너무 고와서 바람결에 비칠 만큼 연했기에, 아스팔트 위에 내려 않지도 못하고, 허공에서만 맴돌았다.
그래, 원래, 단순한 티파니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고집이 세지, 마치 미국사람들 마냥. 겉은 순한 듯 보이지만 자기 속 고집이 완고해서 나중에 혼쭐나는 그런 경우가 많지.
그렇게 걷다 보니 남산 중턱의 어느 유명 호텔 앞까지 우리는 도착해 있었다. 로렉스 시계 바늘은 우리가 벌써 3시간 넘게 같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많이 걷고 해서 시장할 테니,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같이 하겠느냐고 그녀에게 물어보았는데, 그녀는 답변 대신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비추었다. 호텔 앞 줄지어 서있는 택시들, 그녀의 눈길이 그쪽을 향했다. 뒷좌석 도어를 열어주니,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안으로 여미며 물결 흐르듯 차안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리고는 밖에 서있는 나에게 유리창을 반쯤 열며 말했다. “너무 좋은 오후였어요, 연락 주실 거죠?”
난 대답 대신 나름 시크한 웃음으로 대신했는데 그 또한, 내 속마음과 너무나 동 떨어진 행동이었기에 그녀의 택시가 언덕 밑으로 사라진 오랜 후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데릴사위
용산 어머니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어두운 저녁 시간이었다. 원래, 작은 아들에게는 조금 과묵하시던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재촉했다.
“마음에 들던? 낮에 만나서 지금 들어오니 저녁까지 같이 했니?”
나의 대답은 “아니요”였다. “아니 그러면 여태 뭐 했어?”
계속 되는 질문이 잔소리로 들렸다. 그런데, 어머니의 질문을 좀 듣다 보니, 벌써 두 어른 사이에 전화로 말씀을 나눈 것이 분명했다. 내가 너무 무덤덤하게 굴자 어머니도 입을 다무셨다. 그렇게 그 주말은 지나고….
다음 외출에 어머니 집으로 오니, 전혀 어머니답지 않게 서둘러 그녀를 언제 만날 거냐고 물어보셨다.
“엄마, 나 아직 10대 거든, 그리고 아직 군인이고!”
어머니 대답이 웃겼다. “아니 누가 뭐래? 그냥 친구로 만나라고!”
어머니는 무엇을 보시고 사셨는지 나에게 늘 나쁜 여자아이들 조심하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착하고 반듯한 그녀, 유복한 집안, 너무 좋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버럭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엄마는 작은 아들이 데릴사위 되는 게 그렇게 좋아?” 그리고 “걔 미국 안 간데! 얼마나 잘났다고.”
물론, 전혀 내 맘에 없는 말이었지만 그냥 그 순간 엄마에게 이유도 없는 분풀이를 퍼붓고 싶었다. 어머니는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하셨다. “아니, 요즘 다 미국 갈려고 야단인데… 데릴사위는 무슨….”
그리고는 조용히 방을 나가셨고, 그날 이후, 어머니는 그녀에 대하여 아무 말씀이 없었다. 앞으로 작은 아들의 인생에 닦아올 여러 우여곡절들을 미리 보셨더라면 얼마나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았을까?
잠시 후, 갑갑한 마음에, 밖으로 나갔다. 혼자 걷는 밤. 진눈깨비가 날렸다. 당시 나의 삶의 목적이란 단순했다. 첫째가, 미국시민권을 빨리 획득하는 것, 그리고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시고 와서 미국에 와있는 가족들과 합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야반도주 하듯 자원입대한 군 생활, 그리고 지원한 한국 복무. 그런데, 무슨 선씩이나 보고….
# 빗물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
용산에서 삼각지 쪽으로 목적지도 없이 걷는데, 상점 유리창에 비치는 내 손목시계가 왠지 허탈해 보였다. 갖추어 보이고 싶어서 구한 너. 그러나 일반 군인이 착용하기에는 무리인 듯싶은 네 모습. 너는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팔려오고, 나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가서, 다시 한국에서, 서로 어렵게 만난 인연. 잠시 멍하니, 네온이 혼란스러운 한 상점 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서있는 내 머리 위로는 어느새 내리던 눈발이 겨울비로 변하여 온몸을 적시었다.
딱 한번, 플라자 호텔 로비 커피샵에서 선을 보았던 그녀. 언제인가 그녀의 전화번호도 잃어버리고, 그리고 수년이 흐르고, 몇 번의 이사 덕분에 귀하게 챙기던 그 로렉스 시계 박스와 영수증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또다시, 십 여 년 후, 중학교 때 부모님에게서 선물 받은 시계를 자신이 고쳐보겠다고 열어보았다가 망쳐버린 충격이 컸던지, 성인이 된 형님이 시계를 찬 모습은 볼 수 없었고, 그래서 어느 날, 형님에게 그 로렉스를 선물로 주었다. 딱히 이유는, 당시 형님은 나보다 몇 년 후에 미군에 입대하여 직업군인으로 복무하고 계셨는데, 내 어린 시절 군 복무에 대한 추억도 있고 해서다.
# Pay Stub
또다시 세월이 흐르고, 바로 며칠 전, 우연히 옛 서류들을 정리하다 보니, 45년 전 미국 정부에서 받았던, 군인 급여 서류가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한 달 급여 320달러. 그 시절, 무슨 용기로 월급보다 많은 거금으로 로렉스를 현찰로 살 생각을 했을까? 물론 그때, ‘Air King’ 대신 ‘Submariner’나 GMT를 구입했었더라면, 지금 우리 형님은 대박 인데….
삶이란 리허설이 없다고 했던가? 어머니가 소개해 주셨던 첫 선도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고, 이유 없이 어머니 속마음만 태우게 했던 작은 아들. 고등학교 일학년, 대입 준비를 하고 있을 나이에, 그 누구에게도 말없이, 미군에 입대하여야만 했던 나. 우리 가족 걱정과 앞으로의 내 진로에 대한 고뇌로 홀로 길가에 서서 차가운 겨울비에 젖어버린 나와 그 로렉스.
나의 첫 로렉스도 내 수중에서 이미 오래전 떠났고, 그 어머니 역시 이미 오래전 이 세상을 떠나셨고, 남은 것은 가슴 시린 아련한 추억뿐.
글·사진/ Jeff Ahn
(jahn81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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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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