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름다움을 좋아하지만, 사실은 어둡고 탁한 그런 끈적한 것도 좋아한다. 그러니까 교인이면서 시장 바닥을 더 좋아한다고나 할까. 나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글은 아름답게 쓰면서 왜 사람됨은 그렇게 속되냐고 놀라워한다. 좀 야하다곤 할까, 직선적이며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다. 사실 나는 악이 존재한다는 것도, 인간의 선도 믿지 않는 편이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오직 끈적한 인간의 모습이다. 질투하고 저주하며 자신의 악에 공포로 질리는 모습. 삶은 늘 자석과도 같다. 하나가 있으면 또 다른 하나가 있다. 같은 것은 밀어내고 다른 것은 끌어당긴다. 생활도, 내면도, 악과 선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마치 어둠 속에 구분이 없듯 이 편에 있는 선(善)도 저 편에 있는 악(惡)도 모두 착각일 뿐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위선적인 선보다는 악이 나을 때가 있다. 악에는 적어도 위선이 없기 때문이다. 절이나 수도원에 있다고 모두 피안(善)에 속한 것은 아니다. 온갖 오물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곳, 수도원이나 감옥이나 인간은 모두 그리움이 필요한… 다른 모습, 같은 존재일 뿐이다.
세월을 흐르는 강물에 비교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은 정말 화살같이 흐르는 것 같다. 박상규라는 가수가 불렀던가, 내 마음은 조약돌… 둥글게 살아가자고 노래하던 추억이 어제 같은데 벌써 70-80… 추억의 노래가 된 지 오래다. 세월은 참으로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것 같다. 모난 돌을 조약돌로 만들고, 모난 성격을 변화시키지만, 또 세월의 이끼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를 덧나지 않게 감싸 주는 것 같다. 예전엔 툭하면 발끈하고 조급했는데 요즘은 넉넉한 여유가 생겼다. 조급했던 마음, 교만을 추스르게 하는 것도 세월의 힘이다. 언뜻 이 난에 처음으로 글 쓰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에는 그저 진솔하게 써보겠다고 시작했지만 갈수록 뒤죽박죽이다. 특히 첫 작품 차이코프스키에 대해 쓴 글은 지금도 나에게는 최대의 명작이자 최대의 졸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명작이 된 이유는 그것을 가슴으로 썼기 때문이고 졸작이 된 이유는 전혀 글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뭘 쓰려는지 주제도 분명치 않았고 그저 마음만 앞서가지고 감정을 널널이 늘어놓았는데 그 글을 읽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L모 수필가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덕분에 부끄러운 마음을 조금 추스를 수 있었지만 쓰는 일은 나에겐 여전히 멀다.
나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다소 꺼리는 작품도 종종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오직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가 아닐까 한다. 원래 'None but lonely heart’라는 제목의 가곡으로, 오케스트라 작품으로 먼저 들었던 작품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소품들이 수록된 LP판에 들어 있었는데 중간에 이 작품이 나오면 무조건 스킵(skip)해 가며 들었다. 곡도 짧고 그렇게 듣기 어려운 작품도 아니었는데 왜 당시에는 그렇게 이 작품이 싫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None but lonely heart’라는 제목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인생도 외로운데 제목까지 외롭다, 외롭다고 해가며 감상에 빠질 필요가 있을까? 아마 그때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모든 음악은 다소 감상적이다. 그것을 배제하고 음악을 듣는다면 그것은 음악도 아니겠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원색적일 때가 문제이다. 차이코프스키의 경우는 감상의 정도가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걸쳐있다는 것이 간혹 비판받기도 하고 또 대중 속에서 환영받기도 하는, 이중 잣대가 적용되는 작곡가이기도 하지만 'None But lonely heart’ 야말로 차이코프스키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는, 아마도 대명사적인 작품이 아닐까 한다.
문호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방랑 시대’에 나오는 詩에 곡을 붙인 것으로 None but the lonely heart, ‘오직 고독한 마음뿐' 혹은 ‘오직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라고도 번역되어 불리우기도 한다. 소프라노와 테너, 바리톤 등 모든 영역의 가수들이 불렀고 프랭크 시나트라, 그 외에 캐리 그렌트가 주연한 영화 'None but lonely heart’ 등의 주제곡으로도 쓰여 대중적으로 사랑받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의 29세 때 작품으로, 차이코프스키의 가곡 중에는 드물게 러시아 가곡의 대표적인 수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삶에는 누구나 아련한 그리움이 존재한다. 그것이 꼭 누군가의 시를 읽고 음악을 들어야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그저 요즘처럼 찬 바람이 불고 밤하늘의 별이 떠오를 때면 흐르는 세월의 무상함, 그리움을 감추지 못하는 감상의 존재가 되고 만다. 특히 차이코프스키 음악은 너무 어두워서 차라리 비극적으로 들려오기도 하지만 생의 번민으로 자살을 기도했던 차이코프스키였기에 그의 우울은 또 너무나 실존적으로 다가온다.
'None but lonely heart’ … 이 곡은 토마의 오페라에서도 나오는 ‘미농’의 아리아로서 매우 감상적이다. 서커스단에서 탈출한 소녀 미농이 아버지이며 구원자, 애인으로 생각하던 빌헬름이 다른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으로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만다는 내용. 미농의 고향 이탈리아에 대한 그리움, 빌헬름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아 부르는 노래로서 청춘의 恨, 덧없음을 노래하는 실존의 소리가 공명을 준다. - 오직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내 아픔을 알리니 / 홀로, 모든 기쁨을 저리하고/ 저 멀리, 창공을 바라보누나/ 아! 나를 사랑하고 아는 님은/ 저 먼 곳에 있다/ 몸이 어지럽고/ 애간장이 타구나/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내 아픔을 알리라! -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간결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 ‘오직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 제목부터 어딘가 감상주의 아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곡이지만 요즘은 왠지 이런 가곡이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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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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