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킴버랜드 여사의 열정으로 태동한 ‘독립운동 산실’
▶ 뉴욕한인교회 창립 배경이 된 3.1절 기념행사
■ 의친왕 유학시절 인연으로 조선에 관심
■ 컬럼비아 한인유학생 찾아와 3.1 행사 계획
■ 서재필·조병옥 등 친한회 인사들 주축
■ 삭크만 목사 장소제공 뉴욕한인교회 창립
장철우 목사 (뉴욕한인교회 은퇴목사)
▶ 뉴욕한인교회 창립 배경이 된 3.1절 기념행사
뉴욕한인교회 창립은 1921년 4월18일(1930년대 교인이었던 한승인 장로의 증언이다). 교회가 세워진지 한세기가 되었다. 이 때에 백년세월을 마무리하면서 한 매듭을 진다고 한다면, 꼭 기억해야할 역사적 교훈을 기록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찾고 사명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3.1절 2주년인 1921년 3월2일, 뉴욕에서는 대대적인 3.1절 기념 행사가 펼쳐졌다. 맨하탄 뉴욕타운홀에 1,300여명이 모였다. 킴버랜드 여사의 편지에 의하면 킴버랜드 여사와 맨하탄 매디슨 감리교회 삭크만 목사의 이름으로 뉴욕 저명 인사들에게 초청장이 발부되었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당시 뉴욕지역 한인들은 100여명에 불과했다. 청중의 대부분은 미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중국, 인도, 필리핀 등)들이었다.
대회를 주관한 사람은 킴버랜드 여사를 중심으로 당시 컬럼비아 대학원생이었던 조병옥과 길모어 교수, 라이머 박사 등 미국의 친한회 인사들이다. 친한회는 서재필이 거주하는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활약해 오다가, 1920년대부터 뉴욕으로 활동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 대회의 의장은 서재필 박사가 맡았고, 삭크만 목사의 개회기도, 라이머 박사의 3.1독립선언서 낭독(영문), 정한경의 간단한 연설, 전 필리핀 총독이었던 길버트의 연설, 당시 저명한 바이올린연주자 더셀의 바이올린 독주, 미하원의원 메이슨, 호머 헐버트, 길모어 교수의 연설 등으로 진행됐다. 서재필 박사가 간행한 ‘한국평론’(Korea Review)에 의하면 당시의 강연 요지를 간추려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서재필이 “짧지만 훌륭한 연설”이라 평한 정한경의 발언요지는 일부 친한적인 미국인들 가운데 한국문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시정하고자 함이었다. 정한경에 의하면, 일부 미국인 지식인들은 한국적 상황을 해결함에 있어 한국인들의 적응을 촉구하고 있으나 일본은 한국을 수탈하고 이용만 하려고 드는 까닭에 양국민은 서로간의 감정대립에 있어 이미 한계를 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인들의 종이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 한인들 전체의 일반적인 의사라고 결론을 맺었다. 한국인 못지않게 한국을 사랑하기로 이름난 헐버트옹은 주로 한국에 있을 때 자기가 목격한 일본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잔혹성을 폭로하고, 미국이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원칙에 따라 적극적으로 개입, 한국인들을 도와야 된다고 역설했다.
▶ 3.1절 행사후 한인들 소집 교회조직 권면
이날 행사의 빼어놓을 수 없었던 순서는 이 모임의 주동적 역할을 했던 킴버랜드 여사에게 드리는 화환 순서였다. 컬럼비아 대학원에 재학 중이며 한인회 총무로 있던 조병옥이 순서를 맡았다. 그럴 것이 컴버랜드 여사의 주동적인 행사는 컬럼비아 한인 학생과 긴밀한 협조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300여명의 회중을 동원하고 한국의 선교사와 뉴욕의 저명인사를 동원한 계기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 여기에는 킴버랜드 여사가 주인공임을 알 수 있다. 이 여사의 열정이 어디서 나왔을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킴버랜드 여사는 킴버랜드 퇴역 장군(준장)의 아내이다. 어떻게 인연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미국으로 유학온 왕자 의친왕을 알게 된 것이다.
의친왕으로부터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게 됐고 일본인들의 만행을 소상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얼마나 큰 감동을 받었는지 여사는 친한회 회장을 맡을 정도였다. 여사는 컬럼비아 한인유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학교를 방문하여 조병옥 학생 회장을 만나게 되고, 당시 뉴욕에 체류하던 죤스 여사, 노블 여사를 만나게 된다. 두 여사는 한국 선교사로서 20년이상 감리교, 장로교에서 선교사로 남편을 돕다가 은퇴하고 뉴욕에 체류 중이었다.
이들의 열정이 어떠했는지 초창기 한인교회에 지대한 지원이 있었다. 조병옥에 의하면 킴버랜드 여사의 3.1절 행사 계획과 교회창립에 주도적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필자가 이글을 쓰면서 마음 속으로 다짐한 바가 있다. 100여년 흘러간 세월 속에 잊지 말아야할 역사적 기록을 남기기 위해 그녀가 지금도 말해주고 있는 조국의 독립과 박애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무덤을 찾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여사에게 광복과 애국의 열정을 심어주었던 의친왕의 왕녀인 이해경 왕녀가 92세로 건강히 100여년전 창립된 뉴욕한인교회에 계속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를 대신해 역사의 증인으로 서 있다는 사실이 100주년을 맞는 교회에 중요한 점을 찍고 획을 긋는 일이라 믿는다.
100여년전 조병옥이 킴버랜드 여사에게 화환 증정을 했듯이 오늘, 뉴욕한인교회는 아버지 영친왕을 대신해 그 딸 이해경 왕녀가 교회를 대표하여 킴버랜드 여사의 무덤 앞에 조화를 드리는 역사적 일을 이룩해야되지 않을까 다짐한다.
이날 행사를 마치고 킴버랜드 여사는 Commodore Hotel 집회실에 모였다. 이곳에는 킴버랜드 장군의 사무실이 있었다. 3.1절 행사의 뜨거운 열기가 식기 전 여사가 중심이 되어, 삭크만 목사와 조병옥, 윤헬렌 등 학생과 안정수 등 대회에 참가했던 한인들을 소집한 것이다.
킴버랜드 여사의 모임 취지는 계속적인 모임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대부분이 교인이었던 그들에게 교회조직을 권면했던 것이다. 자리에 함께한 삭크만 목사는 서슴없이 자기 교회를 사용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뉴욕한인교회가 창립된 것이다. 1921년 4월18일 매디슨 감리교회에서 창립예배를 드렸다.
(맨하탄 23가 매디슨, Madison Episcopal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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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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