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들려주는 ‘뉴욕지역 독립운동 발자취’ <3>
뉴욕한인교회에서 활동했던 한국 여성 운동가들. 왼쪽부터 김활란(왼쪽부터), 서은숙, 박인덕, 박마리아. 박은혜,
▶ 1927년 새 건물로 이주후 아파트로도 사용
▶ 김활란·서은숙·박인덕 등 여성운동가들 인터내셔널 하우스에 머물며 활동
▶ 경제공황때 70~80명이 교회서 기숙, 힘들게 번 임금 독립자금으로 바쳐
■진정한 애국자들의 산실 뉴욕한인교회
현재의 위치로(633 W. 115 St.) 교회가 이전한 때는 1927년이다. 맨하탄 21가 매디슨에서 4년동안 있었다. 이용직이 전도사로 있을 때, 가옥기본금 모집위원회를 발기했다.
이유는 1927년 4월18일 창립 일까지 건물 미납금(약 4,000달러)을 완납하고 현 건물이 4층 아파트인 만큼 교회당답게 개조하자는 취지였다. 노스웨스턴 의대 외과 의사로 졸업하고 뉴욕에 장로교 병원에 근무했으며 이용직과 사촌지간인 이용설은 4.000달러를 모금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당시 4,000달러는 학생, 노동자였던 30~40명 교인으로는 모으기 불가능한 액수였다. 그러나 당시 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안정수가 그 절반인 2,000달러를 헌금했다. 여기에 고무가 된 위원들(장덕수, 윤흥섭, 이진일, 이두행, 김도연 등)이 앞장서 헌금을 하여 무난히 4,000달러가 모여졌다.
그때 조병옥을 비롯한 컬럼비아 대학 재학생들이 교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활란, 서은숙, 오천석, 장덕수 등이 있었다. 건축금액이 무난히 모금이 되자, 교인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현재 건물을 매각하고 컬럼비아 대학이 가까운 허드슨 강변의 좋은 지역으로 이사하자는 생각이었다.
현재 건물 당시의 시가로 3만5,000달러였다. 미연합감리교 선교부에서 1만7,500달러를 보조했고, 나머지는 한인교회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건물을 살 수 있었다. 이 소식은 학생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었다. 지하실에 부엌이 있고, 1층에 예배실, 2~4층은 학생관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건물을 수리하자던 의견에서 새 건물을 구입하는 것으로 용단을 내린 것은 당시 이들의 안목이 얼마나 진취적이었으며, 장래의 희망인 학생들을 위해서 결단한 것은 너무도 귀한 일이었다. 1927년 4월18일 새 건물에서 예배실을 꾸미고 예배를 드리며 약 30여명이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로 사용할 수 있었다.
자연히 뉴욕한인교회는 학생들의 중심교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여학생들은 가까운 인터내셔널 하우스(International House)에 머물렀고, 남학생들은 교회 20여개 방에서 기숙했다. 맨하탄 음대, 유니온 신학교, 컬럼비아 대학에서 5분 정도 거리로 한 블럭 떨어진 위치였다.
1번 전철역이 또한 5분 거리였기 때문에 맨하탄 차이나타운에서 일하는 한인 노동자들 대부분이 교회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글자 그대로 뉴욕한인교회는 한인들의 보금자리와 같았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인터내셔널 하우스에 머물던 김활란, 서은숙, 박인덕, 박마리아(이기붕의 아내), 박은혜(장덕수의 아내)와 조병옥, 안정수, 이원준, 이진일, 임초, 이두형, 이용선, 이용직, 김도연, 유태경, 윤흥섭, 김필명, 이복원 등이 교회에 출석했는데 대부분 컬럼비아대 재학생들이었다.
당시 교회는 자연히 이승만을 따르는 동지회와 안창호를 따르는 국민회와 흥사단 활동이 있었다. 가끔 애국에 대한 열띤 논쟁 끝에 멱살을 잡는 싸움도 일어났지만, 나라사랑의 마음은 하나요, 믿음도 하나였다고 한다. 3.1절이나 명절 때 어쩌다 애국가를 부를 때는 통곡의 울음소리인지 애국가 노래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는 모두가 하나로 된 식구였다.
1927년 맨하탄 115가로 이전한 뉴욕한인교회 건물.
■12개 방에 80명 넘게 살며 모은 돈 임시정부로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밭 농장과 미서부 농장을 거쳐, 임금이 높다는 철도공사(콜로라도와 유타주를 연결하는 로키산맥 터널공사)에서 일하다가 자동차 붐이 일어나던 1925년 시카고의 공장들을 거쳐, 지하철과 다리공사가 한창이던 뉴욕으로 일자리를 찾아온 한인 노동자들이 10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 대부분은 미혼자들이었고 학식도 없어 어쩌다 본국에서 편지가 오면 목사님이 편지를 읽어주고 답장을 써주는 일을 맡았었다.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 공황기 때는 70~80명의 한인들이 뉴욕한인교회에서 기숙했다. 작은 방이 고작 12개에 불과한데, 80여명이 넘게 살았다니, 이들의 고생을 짐작할 수 있다. 손바닥이 노동으로 아스팔트처럼 되어, 딱성냥을 손바닥에 그어 불을 켰다는 일화가 있다.
어쩌다 우남 이승만이 교회에 나올 때면 동지회에 속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꼬깃꼬깃 모아놓은 달러 지폐를 우남에게 전달하는가 하면, 도산 안창호가 들릴 때도 국민회, 흥사단 회원들이 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였다. 공부한 학생들은 귀국하여 직장과 명예를 갖지만, 이들 노동자들은 대부분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 땅에서 비석도 없이 묻히고 말았다. 이들이 받은 임금은 피와 눈물, 땀으로 이루어진 금전이었다. 거의 모두가 애국 성금으로 바쳐진 돈들이다. 이들의 애국심이 어떠했는지 한 토막의 얘기를 소개한다.
1936년 교회 지하실에서 송년회가 열렸다. 그때 교인 김용하가 손님으로 참석한 김영우를 칼로 찔렀다. 김영우는 일본정부의 관리로 워싱턴에 근무하는 외교간 신분이었다. 그는 장덕수의 친구였다. 친구와 한인들도 만날 겸 뉴욕한인교회를 찾아왔던 것이다.
김용하는 조국의 배반자인 친일파가 무슨 낯으로 신성한 교회를 찾아왔느냐 호통을 치며 부엌으로 달려가 칼을 들고 와서 찔렀던 것이다. 김영우는 피를 흘리며 달아나 병원으로 갔다. 얼마 후 친구들이 찾아가 사과하자 김영우는 오히려 자기의 친일 행적을 뉘우치며 대한인의 애국적 행동을 칭찬하며 자신이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동포들이 가졌던 애국심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오늘 후손들은 이런 사실과 정신, 그리고 애국혼을 너무 잊고 있다.
10여년전 필자가 뉴욕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청년들을 대동하고 1923년도에 서거한 애국지사 염세우와 황기환의 무덤을 같이 찾아간 적이 있다.
그 주위에 비석이 없는 빈 공간이 넓어 관리 사무실을 찾아 명단을 살폈는데, 그 주위가 대부분 김씨, 박씨, 이씨였다. 우리 애국의 선조들이 비석도 없이 묘지 한쪽 구석에 묻혀 있었다. 찾는 이도 없는 저들이 100여년 세월 속에 얼마나 쓸쓸히 있었을까.
애국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간직하고, 무덤이라도 찾아가 확인할 때 조상의 애국의 혼이 나에게 잘 나타나게 된다. 뉴욕지역에서 100여년간 애국의 정신과 혼을 보여준 애국 선배들의 소리를 다시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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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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