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뉴욕에 온 이승만(앞줄 왼쪽 세 번째) 박사와 컬럼비아대학에 재학중인 뉴욕한인교회 교인들이 컬럼비아대학 캠퍼스에서 함께한 사진이 1932년 월간지 ‘코리안 스튜던트 블루틴’ 3월호 1면에 실렸다.
하와이 이민자 통역관으로 미국행
이승만과 의기투합 독립운동에 박차
‘우라키’ ·‘3.1 신보’ 등 발간
동부지역 동포들 애국심 고취
윤병구 목사
■뉴욕한인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진 애국활동
뉴욕한인교회가 독립운동의 요람지가 된 것은 창립취지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는 사명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대한 조국을 구하는 두가지 사명이다. 이 뜻에 부합하는 제 3대 목사로 오신 이가 윤병구 목사이다.
1927년에 미연합감리교 교단으로부터 담임으로 파송을 받았다. 윤병구 목사는 존스 목사로부터 한국에서 세례를 받고 하와이 이민자들과 같이 통역관으로 제1차 1902년에 하와이로 온 것이다. 그는 하와이와 서부에서 이승만, 안창호와 같이 독립운동에 많은 활동을 하다가 뉴욕에 온 것이다. 당시 존스 선교사 부인이 뉴욕한인교회를 돕는 친한회 여성회장으로 있을 때인 만큼 한국에서부터 가깝게 지나던 사이였기에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전임목사들이 2년여 짧은 목회기간에서 실상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윤병구 목사때부터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욱이 그처럼 바라던 내 집과 같은 건물을 구입하고 1927년에 현 교회로 이전하면서 안정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1929년부터 시작된 미국 경제공황기에 들어서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이 교회운영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교단 본부에서 목사생활비가 끊겨 윤 목사 가정은 뉴저지 농토를 마련하고 이사를 해야 했다. 그때도 교회를 재정적으로 돕는 존스 선교사 부인과 파이퍼 여사의 큰 도움이 있었다. 경제공황기의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약 10여년간 윤 목사는 교회를 지켰다. 이유가 있었다.
일본의 한국침략의 전조로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지고 1910년 한일 합방으로 조국의 장래가 절망에 빠졌을 때, 해외에 나와 있는 뜻있는 동포들이 뜨거운 애국심을 갖게 된 것이다. 지성인이었던 윤병구 목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윤병구 목사가 뉴욕한인교회로 부임한 첫째 동기가 애국운동의 거점이 바로 뉴욕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905년 8월14일이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하계 백악관으로 유용하게 쓰던 오이스터 베이 새가 모어힐 별장에 이승만과 윤병구 목사 두 청년이 대통령을 면담한 것이다. 이들은 대한독립을 위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내용은 을사늑약의 조약을 파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정치행보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윤병구 목사의 독립운동의 열정을 짐작케 한다.
1931년 9월18일 일본의 만주침략의 도발이 시작되었다. 도발 2주만에 만주의 15개 도시가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그해 11월 뉴욕한인교회는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한인의 성명”(The Korean Manifesto against the Japanese Invasion in Manchuria)이라는 영문으로 된 성명서를 한인연합단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국민회, 동지회, 흥사단의 대표들이 서명을 했고 당시 대통령 후버와 미국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때에, 1932년 위싱턴에서 애국운동에 활동 중이던 이승만이 뉴욕 NBC 방송국 초청으로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규탄을 방송에 토로하게 된 것이다.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같이 하던 윤병구 목사와 이승만은 의기투합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교회를 중심으로 애국 활동을 한 이들은 다음과 같다. 동지회에 속한 남궁염, 윤치영, 최준수, 이기붕, 이순용, 이병두, 김세선, 김계봉, 윤병구, 허정, 장덕수, 김양수, 40대가 넘어선 안정수, 홍득수, 이봉수, 송세인, 신성구, 이진일, 그리고 흥사단 계열로 임초, 조병옥, 허진업, 한승인, 김경, 그 외 임창영 등이었다. 경제공황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으나, 윤병구 목사는 이때에 뉴욕교회에 가장 많은 독립운동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북미 한인 유학생 총회 발족
1921년 11개 지역 한국학생들이 뉴욕에 모여 4월30일 북미 한인 유학생 총회가 발족됐다. 이 때 뉴욕한인교회 전도사 직책을 맡고 있던 이용직이 회장이 되었고 교회창립자 중심에 있던 조병옥이 부회장을 맡았다. 이를 계기로 “우라키”라는 한글 기관지가 유학생 중심으로 1925년에 발간되고 영문으로 “코리안 스튜던트 불르틴(Korean Student Bulletin)”이 1923년 1월부터 월간지로 발간됐다.
이 모두 애국운동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계몽과 학술논문 그리고 동포들의 소식지였다. 현재도 우라키는 미주 학생들의 활동과 애국운동의 큰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이러한 기관지가 윤목사 부임전 시작된 것이나, 윤 목사의 부임 후 더욱 활성화되었고 교회 중심의 한 사역으로 발전해 나갔다. 윤병구 목사의 후원과 애국정신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즈음, 애국을 전제로 한 삼일신문이 발간되었다. 1928년 삼일절을 기하며 발간될 예정이었으나 늦어져 6월29일 창간호를 인쇄했다. 신문 1면에는 대한반도가 쇠사슬에 묶여 있는 그림이 그려졌다. 대한동포들에게 애국심을 일깨우기 위해 창간된 3.1 신보는 전 세계에 널려져 있는 동포들에게 배포됐다.
당시 미 서부에는 신한민보가 있었고 하와이에는 이승만계의 국민보가 있었다. 뉴욕에서 동포를 위한 애국 신문의 필요성을 느끼고 허정이 앞장을 섰다. 실무진을 뉴욕한인교회에서 찾게 되었다. 컬럼비아 재학생으로 한인교회에 기숙하고 있는 장덕수, 김양수, 김도연 등이다.
주간으로 발간되던 3.1신보는 1930년 6월 폐간되었다. 이유는 자체 내 분열도 원인이었으나 재정적 후원을 맡은 허정이 워싱턴을 떠나고 장덕수가 이듬해 런던으로 떠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뒤를 이어 이기붕이 맡았으나 경제공황기가 닥치면서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약 2년간 100회 이상을 망향하면서 동부와 뉴욕일대에 동포들의 소식, 고국과 세계의 소식을 알리며, 특히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3.1 정신으로 계승한다는 신문사의 취지가 동포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였을 뿐 아니라 애국의 힘과 독립의 희망을 주었다. 이러한 여파와 애국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뉴욕의 분위기는 당시 템플 대학에 재학중이던 작곡가 안익태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여름을 기해 1935년 뉴욕한인교회에 거주하면서 연주 활동과 함께 줄리어드 음대에 수강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에 안익태가 뉴욕한인교회 예배당의 피아노를 두드리며 애국가를 작곡하게 되었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하기 위해 치던 피아노.
1937년 템플 대학을 졸업하고 비엔나의 지휘자이자 작곡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사사하기 위해 떠난 그는 당시 유럽에서 명성을 날리던 부다페스트, 파리 교향악단, 런던 심포니의 지휘자로 활약하게 된다. 그가 치던 낡은 피아노가 교회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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